늙은 창부처럼 몰락해버린 서커스…. 천막을 싣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어디엘 가도 전깃불 밑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세상은 변해갔지만, 가설무대는 공연장소를 구하기마저 어려워져 변두리의 벽돌공장 부근이나 김장시장이 열리는 시장 옆 공터에서 막을 올리며 천막무대는 늙은 창부처럼 몰락해갔다. 화장을 해도 주름살을 가리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창부의 얼굴처럼, 세월은 곡예단의 얼굴을 밟고 지나갔던 것이다. -한수산 <부초(浮草)> 중에서
1954년에 발표한 이탈리아 영화 <길(La strada)>에서 야수와 같은 떠돌이 곡예사 잠파노(앤서니 퀸 분)는 왜소하고 어딘가 부족한, 그래서 천사와도 같이 순수한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 분)를 데리고 길을 떠난다. 그들이 길 위에서 펼쳐 보이는 건 싸구려 곡예이지만, 그 곡예를 통해서 그들의 가엾은 영혼은 파멸과 완성의 길을 간다. 잠파노는 술만 취하면 아무 여자나 지분거렸고, 기어이 연약한 젤소미나까지 넘보기에 이른다. 겨울을 피해 의탁한 서커스단에서 줄타기의 명수 ‘얼간이’는 젤소미나에게 트럼펫을 가르친다. 더구나 그 소리 속에 감춰진 슬픈 진실을 가르친다.
잠파노와 같이 있는 게 네 운명이야. 난 알 수 없지만 이 조그만 돌멩이도 다 쓸모가 있을 거야. 세상에 쓸모없는 물건이란 없는 거야. 머리가 좀 모자라도 너도 무슨 쓸모가 반드시 있을 거야.
그렇지만 ‘얼간이’는 잠파노에게 죽임을 당하고, 쫓기던 길 위에서 젤소미나와 헤어진 잠파노는 몇 년 후 후미진 부둣가에서 슬픈 노랫가락을 듣는다. 어느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노래는 젤소미나가 흥얼거리던 노래, ‘얼간이’가 젤소미나에게 가르쳐준 바로 그 노래였다. 여인에게서 노래의 주인은 이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잠파노는 텅 빈 바닷가에서 목 놓아 울부짖는다.
나는 외톨이야….
세월이 바뀌어 1984년 캐나다 퀘벡에서 초연되었다는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에서 퀴담(익명의 행인)에 의해 길로 나서는 조(Zoe)는 일상의 따분함에 지친 소녀일 뿐이다. 서커스는 마침내 쇼가 되고, 쇼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휘황한 불빛 아래 무대는 정신없이 돌아가고, 사람들은 단지 그 불빛에 넋을 놓을 뿐이다. 그래도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기조는 ‘슬픔’이라고 치장된다. 그 슬픔은 얼핏 젤소미나의 슬픔을 닮은 듯 보이지만, 그는 단지 나어린 창부의 얼굴화장처럼 그냥 경박하거나 시늉일 뿐이다.
서커스가 이 땅에 처음 말뚝을 박은 것은 1911년 5월 1일, 일본의 ‘고사쿠라’ 곡예단이 부산에서 공연을 가지면서였다. 이때까지 흥행의 대종을 이루던 사당패는 개화의 물결에 밀려 이미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 구경거리의 불모지에 뛰어들기 시작한 일본인들이 통감정치와 더불어 대규모의 흥행집단을 끌고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 십여 개의 단체가 한반도와 만주까지를 오르내리며 그 펄럭이는 천막을 올렸다. -한수산 <부초> 중에서
동춘서커스단은 1925년 일본인 서커스단에서 활동하던 고 박동춘 씨가 조선인 30여 명을 모아 창단한다. 1927년 목포시 호남동에서 첫선을 보였고,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한때 단원이 300여 명에 이르렀으며, 허장강, 서영춘, 백금녀, 배삼룡, 남철, 남성남, 장항선, 정훈희 등이 이곳에 몸을 담기도 했다.
“그랬지. ‘아니타’니 ‘기노시타’니 하는 곡마단이 서울에 올 때면 얼마나 화려했는가. 파고다공원 옆은 단골장소였지. 규모도 대단했고. 만주공연을 가면 또 어땠나. 남부여대해서 이불보따리에 바가지 하나 올려놓고 고국산천을 떠난 사람들이 공연 끝나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향소식을 묻지 않던가.” -한수산 <부초> 중에서
어느덧 9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세상은 ‘태양의 서커스’시대가 되었건만, 동춘서커스단은 여직 잠파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듯 보인다. 그나마 3대 단장인 박세환 씨에 의해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안산 대부도에 상설공연장을 마련하여 어렵싸리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속내를 들여다볼작시면 꼭 아련한 옛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우아누리’(어릴 때 서커스단에 들어온 사람)를 구하기도 어려우니 공연의 태반은 중국 기예단이나 러시아 볼쇼이로 끌어간다. 실낱같이 남은 애환마저 ‘남의 것’으로 채워지고 있는 셈이다.
아니, 어쩌면 그 애환이야말로 진짜 애환일지도 모른다. 내남할 것 없이 세상을 떠도는 모든 넋들은 가엾다. 이역만리에 와서 줄을 타고 공을 굴리는 그들을 볼 때, 가슴에 고여 있던 슬픔이 문득 되살아난다. 말도 서툰 그들이 우리를 보고 말한다. 자, 슬픔을 걷고 웃음을 지어보세요. 아직 이렇듯 몸이라도 움직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그러나 그들이 열길 허공에서 빈 몸짓으로 휘청일 때, 애써 감춘 눈물자국이 드러나고 우리의 현실은 남루한 깃발로 나부낀다. 그래, 세월이 밟고 간 것이 어찌 곡예단의 얼굴뿐이랴.
_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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