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20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닿는 조그만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침 움푹한 떡시루 같다고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주위가 이렇게 시적이니만치 그들의 생활도 어데인가 시적이다. 어수룩하고 꾸물꾸물 일만 하는 그들을 대하면 딴세상 사람들을 보는 듯하다. -김유정 <오월의 산골작이> 중에서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은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강원도 산골마을이다. 그런데 이 작은 마을에 봄이 오면 어김없이 한바탕 잔치가 벌어진다. 아니, 벌어졌다. 김유정문학제. 이곳 실레마을 출신의 작가 김유정의 문학을 기리는 잔치다. 그런데 해마다 4~5월이면 열리던 봄잔치가 코로나19로 몇 년째 열리지 못하고 있다. 원래 2020년부터 가을에 열리는 ‘실레마을 이야기잔치’와 합쳐 거듭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열리지 못했고, 금년 가을잔치도 어찌 될지 모르겠다.
1930년대 실연의 상처와 병고를 안고 낙향한 김유정이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픔을 달래던 실레마을과 금병산 일대는 고스란히 김유정 문학의 산실이자 무대다. 김유정이 야학과 계몽활동을 위해 금병의숙을 세웠던 자리에는 그의 기적비(紀績碑)가 서 있고, 마을 안쪽에 들어선 김유정문학촌에는 문학관과 함께 생가가 재연되어 있다. 금병산 기슭에는 소설의 현장을 따라 ‘동백꽃길’, ‘금따는콩밭길’, ‘산골나그네길’, ‘봄봄길’ 등이 이어진다.
금병산 등산로 입구의 산국농장은 김유정문학기행의 안내소 같은 곳이다. 과수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는 김희목 씨가 운영하는 농장으로, 4월이면 복사꽃이 진짜 무릉도원을 이룬다. 시인은 2002년 문을 연 김유정문학촌의 산파역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춘천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한 전상국 작가가 처음 문학촌을 조성할 때 몇몇 지인들과 모여 구상을 펼쳐나간 곳이 바로 이곳 산국농장이었다. 그들은 마치 ‘도원(桃園)의 결의’인 양 산국농장 복사꽃 아래서 문학촌 조성의 꿈을 다짐했던 것이다.
김유정문학촌의 관문격인 김유정역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인물 이름을 딴 역명을 지녔다. 1939년 경춘선 개통 당시부터 신남역으로 불리다가 김유정문학촌이 조성된 이후인 2004년 김유정역으로 개명했다. MBC 드라마 ‘간이역’의 배경이 될 정도로 한적하던 이 시골역은 2010년 수도권 전철이 개통되면서 ‘새 역사’에 역할을 내어주고 ‘구 역사’로 남게 되었고, 지금의 김유정역은 강촌 레일바이크의 기점으로 탐방객들의 발길로 북적이는 곳이 되었다.
당연히 돌아가는 길은 김유정역에서 강촌까지 레일바이크를 타고 간다. 이 길은 북한강의 수려한 풍경 속을 달려 나가는 길이다. 강촌레일파크 김유정역에서 중간휴게소까지 6km는 레일바이크를, 휴게소에서 강촌역까지 2.5km는 낭만열차를 이용한다. 레일바이크를 타고 중간 중간 테마가 있는 터널을 통과하면 이내 들꽃군락이 펼쳐지고, 철교를 건너고 작은 폭포도 지난다. 열차로 갈아타고 가는 동안에도 내내 북한강의 짙푸른 물줄기가 따라붙는다.
2015년 봄, 레일바이크를 타던 날 마침 한 복지단체의 후원으로 봄나들이 길에 나선 장애인가족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간간히 내리는 봄비 속에서도 가족들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앞차의 계집아이는 레일바이크가 조금만 덜컹거려도, 터널로 들어가거나 다리를 건널 때도 마냥 깔깔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마 나는 오랫동안 이 아이의 맑고 사랑스런 웃음소리를 잊지 못하리라.
하지만 열차로 갈아타고 가는 동안 난간에 걸터앉아 스쳐지나가는 눈앞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한 가족의 뒷모습은 잠시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부모 사이에 낀 아이도 양쪽 어깨를 내맡긴 채 말없이 앉아있었다. 언젠가 아이는 이날의 풍경을 기억하게 될까. 다시 이 길을 온가족이 함께 갈 수는 있을까. 강촌역에서 내리자 구 역사의 벽면에는 커다란 입맞춤 사진 위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make your memories.”
젊은 날, 방황하던 청춘은 대성리나 남이섬, 강촌쯤에서 잠시 청춘 본연의 모습을 되찾곤 했다. 행색이래야 야전점퍼에 워커, 기타 하나, 잘해야 야외용 컨버터블뿐이었지만 발산에 목말랐던 청춘들은 거기서 해방구를 찾았다. 비록 예전 추억 속의 모습은 아니더라도 강촌은 넘쳐나는 청춘들로 여전히 아름답다. 고전적인 자전거를 MTB가 대체하고, 레일바이크에 모터바이크까지 지금의 강촌은 온통 바퀴들의 천국이지만, 그 바퀴들 역시 오랜 추억 속을 굴러왔으리라.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서로 다른 새떼 지저귀던 앞뒤 숲이/ 보이고 안 보인다. -황동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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