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첫째아들의 코로나 해제일인 동시에 학교 2학기 중간고사 시작일이다. 아픈 배 때문에 아침밥을 챙겨 먹지 못한 아들을 자동차에 태웠다. 시험 기간이기도 하고, 격리해제라도 조금은 조심해야 할 일이니까. 아들을 학교 정문 앞에 내려주면, 비보호 좌회전을 받아 동네 골목길을 돌아 다시 주도로로 합류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나는 보행 신호 횡단보도 앞서 좌회전을 했고, 마침 반대편 우측에서 좌회전하던 택시와 동선이 겹쳤다. 경적을 길게 울리는 택시! 아이구, 미안합니다.
집이 가까운 사거리에서 노란불이 켜졌을 때, 선택이 필요했다. 빨리 건널 것인가? 혹은 멈출 것인가? 전자를 선택한 나는 이미 보행 신호가 켜진 직진 방향 쪽 횡단보도를 다시 지나치고 말았다. 횡단보도 보행자가 내 차를 찌릿 쳐다보는 걸, 백미러를 통해 보았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나는 두 번이나 규칙을 위반하고 말았는데, 자칫 택시와 충돌하거나 사람을 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운수가 나빴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하인리히 법칙[대형사고가 발생하기 전 그와 관련된 29번쯤의 경미한 사고와 300번의 징후가 나타난다는 통계적 법칙] 중 내가 300에서 29로 가는 어디쯤 있다고 할 것인가?
그리고 언뜻 든 생각. 도로 위에서는 빨간불 파란불 그리고 노란불이 켜진다. 우리는 위험과 안전 그리고 경고를 읽는다. 우리 삶에서도 그런 사인들이 있는가? 있다. 규칙들, 법칙들.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약속한 많은 규범들. 사소하다고,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걸 어기면? 300번의 위반 뒤에는 사고가, 그 뒤엔 재해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요즘 주변에선 여행과 축제가 복원되고 있지만, 집에서는 시간이 되돌아간 듯 코로나의 위세가 거세었다. 20년, 21년에 진행되지 못했던 주민자치회 총회도 대면으로, 동네 노래자랑은 햇살 속에서 진행됐다. 야외 마스크 규제는 전면해제됐다. 우리 집안 풍경은 반대다. 한 달여 전쯤에 우리 가족들은 모두 시골집으로 모였다. 그런데 조카들이 참여하지 못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그러나 대학을 이미 졸업한 청년들이다. 통화를 해보니 모두 목이 잠겨있다. ‘세게 지나간다는 젊은이들의 코로나 감염’이 그들을 덮쳤다.
“흔한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라고 리처드 파인만은 썼다. 대한민국의 2022년 10월 현재 확진자 수는 2,490만이다. 사망자는 28,544명. [참고로 전 세계 확진자 수는 6.19억 명이고, 사망자는 655만. 감염자 비율은 우리가 높다(검사가 확실하니 그렇겠지?) 사망자 비율은 세계가 얼추 백 명 중 하나라면, 대한민국은 대략 천 명 중 하나다(의료수준과 대비도 잘 돼 있어서?)] 우리 국민 중 반 이상이 걸린 전염병이니, 조카나 아들들의 감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최근 우리 집에서도 두 명이 코로나에 걸렸다. 내가 ‘아이들’로 부르는 고2, 중3 아들들도 ‘드디어’ ‘기어코’다! 첫째가 증상을 보였고, 검사하고 격리가 된 뒤, 밀접접촉자 검사에서 둘째에게 신호가 떴다. 이미 4월에 감염돼 격리됐던 아내까지 포함해 우리 집도 3/4이 코로나에 감염된 거다. 그네들 증상도 비슷했다. 인후통이 왔고, 두통과 몸살을 겪었고, 기침을 포함해 제반의 코로나 증상을 똑같이 앓았다. 방에 격리된 아이들은 학교에 통보한 뒤,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처럼 동굴 생활을 겪었다.
우리는 흔한 일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흔한 일에도 언제나 그것을 바라볼 방향과 개념이 있다. 그걸 무시할 것인가? 불을 손에 쥔 듯 떨쳐버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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