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빈 의자

혜범 작가/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3.02.28 09:00 의견 0

안개가 일렁였다.

보슬보슬 비도 밤새 내렸다. 마치 봄을 기다렸던 나무들에게, 많이 기다렸지? 하는 양 토닥거리듯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가지에도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개울은 얼었던 얼음이 녹아 시냇물 찰랑거리고 버들은 눈떴다.

새싹들도 이제 제법 돋아난 雨水였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끓여 봉당에 앉으니 봉당 앞의 빈 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빨갛고 파랗고 볼품없는 플라스틱 의자들이다. 햇빛에 색이 바랜 놈도 있고 쌩쌩한 놈도 있다.

빈 의자

정호승

빈 의자는 오늘도 빈 의자다

빈 의자는 빈 의자일 때 가장 외롭지 않다

빈 의자는 빈 의자일 때 가끔 심장을 꺼내 햇볕에 말리고

의자에 앉았다 간 사람들이 놓고 간 더러운 지갑도

휴대폰도 꺼내 말린다

빈 의자는 오늘도 빈 의자에 앉았다 간 낙엽을 생각한다

빈 의자는 오늘도 빈 의자에 앉았다 간 첫눈을 생각한다

첫눈 위에 발자국을 몇개 찍고간 산새를 생각한다

그 산새를 따라가며

빈 의자에 앉았다가 울고 간 사람을 생각한다

빈 의자는 비어 있기 때문에 의자다

빈 의자는 빈 의자일 때 가장 고독하다

빈 의자는 빈 의자일 때 가장 정의롭다

먼 데서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밤

빈 의자는 빈 의자일 때 당신을 가장 기다린다

봄은 그렇게 매 번 선악을 넘어 왔다. 저마다의 추위로 끙끙 앓으며 얼어붙은 땅을 기듯, 허공 중에 떠오듯 빈 의자들로 찾아들곤 했다.

얼마나 빈 의자들을 바라보았을까. 얼마나 빈 의자에 앉았던 한 사람을 추억했을까. 뚫어져라 바라보던 빈 의자에서 시선을 거두고 조금 걸어볼까, 하며 걸음을 내딛어 본다.

우수라 해도 아직은 춥다. 부르르 몸을 한번 떨고 빙그레 웃어도 아직은 푸른 어스름이다.

걸음걷던 나는 눈을 반짝였다. 산이, 숲이 산길이 빈 의자 같다는 생각이었다. 벌레들도 보이지 않았고 산새들도 보이지 않았다. 벌레들도 산새들도 아직 밤을 뒤척이고 몸부림치고 있는 건가.


매일 아침에 일어나 똑같은 일들을 반복하는데 빈 의자를 채우는 일 같다. 그걸 깨우쳐주는 빈 의자의 용기는 어머어마했다. 비탈진 길을 조금 내려가니 시냇물이 반겼다. 쪼그리고 한참 앉아보니 빈 의자에 개울물들이 어둠속에 앉았다 조용히 내려간다.

새벽기도를 끝내고 나오는데 앰뷸런스 한 대가 절 마당에 서있다. 뭐야? 나를 데려가려고 저승사자가 와 있나? 했는데 아니다. 한 사람이 내린다. 앰뷸런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간호사가 있었고 누워있는 환자는 폐암 말기이고 오늘 내일 하는 이가 새벽 종소리, 목탁소리를 듣고 싶어 왔다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다는 거다. 누워 있는 이의 손을 한 번 잡아 준 후 그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고 용서해달라며 우는 얼굴을 쓰다듬어주고는 앰뷸런스를 나왔다. 그리고 앰뷸런스는 세상 길이 끝나는 곳까지 왔다가, 다시 산 밑으로 조심조심 다시 내려갔다.

버들강아지 개울가에 앉아 해맑은 얼굴로 나를 건네다 보았다. 흘러가는 물을 보았다. 버들강아지의 응원에 어렵고도 힘들었던 밤을 끈기있게 잘 마무리짓고 새벽으로 흘러 내려가는 물들. 돌돌거리며 산 밑으로 흘러가는 물들의 노래를 들으니 꺼이꺼이 울음울다 웃음이 쿡 나온다. 용서했다고 여겼는데, 용서했던 게 아니었나보다. 문득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니 목구멍까지 올라오던 그 어떤 감정, 가슴의 불덩어리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나도 빈 의자라는 생각에서만은 아닌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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