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나무의 발성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3.04.25 09:00 의견 0

나무의 발성

박완호

씨앗이라고, 조그맣게 입을 오므리고

뿌리 쪽으로 가는 숨통을 가만히 연다.

새순이라고 줄기라고 천천히

좁은 구멍으로 숨을 불어 넣는다.

길어지는 팔다리를 쭉쭉 내뻗으며

돋아나는 가지들을 허공 쪽으로

흔들어 본다. 흐릿해지는 하늘 빈자리

연두에서 초록으로 난 길을 트이며

이파리가 돋고 꽃송이들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을 위해

아직은 나비와 새들을 불러들이지 않기로 한다.

다람쥐가 어깨를 밟고 가는 것도

몰래 뱃속에 숨겨둔 도토리 개수가

몇 개인지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한다.

하늘의 빈틈이 다 메워질 때쯤

무성한 가지들을 잘라내고 더는

빈 곳을 채워 나갈 의미를 찾지 못할 만큼

한 생애가 무르익었을 무렵

가지를 줄기를 밑동까지를 하나씩 비워가며

기둥을 세우고 집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의자와

몇 권의 책 빈 술병을 올려둘 자리를 준비한다.

그리고는 어느 한순간 잿더미로 남는

황홀한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더는 아무것도 발음할 필요가 없는

바로 그 찰나, 나무는 비로소

한 그루 온전한 나무가 되는 것.

나-無라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천천히 발음해 본다.

# 박완호 시인의 시를 읽으면 즐겁다. 독자를 암시 된 시인의 시세계로 끌고 들어감에 있어 무엇보다 어렵지 않아 편안함을 준다.

일찍 이양하는 나무의 위의에서

산사의 당우나 유명한 고승보다도 수백 년 그 자리에서 살아온 나무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설렘과 감동을 준다. 무더운 여름 마을 느티나무가 지키는 마을을 지나면 든든해지기도 한다. 그렇다. 나무들은 인간이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고 엄숙한 태도 차림새를 가지고 있다, 고 했다.


시인은 한 그루 나무가 온전해지는 나무의 삶을 의인화 해서 이야기 서두를 꺼낸다. 아무리 큰 나무도 어릴 때는 입을 오므리고 조물락거리던 씨앗이었다고.

새순 줄기, 잎을 내고 가지를 허공에 팔 뻗기가 나무는 쉬울까?

고통을 참아 내고 씨앗에서 세상에 뿌리박기가 쉬웠을까? 숨을 불어넣어 한 우주를 만든다는 것. 시인은 생명에 대한 신비로움을 이야기한다. 아, 이 땅의 모든 나무들.

그렇게 입을 오므려 세계에 적응해 하늘 빈 자리(허공)에 꽃을 피우기, 나무로서 자리를 차지하기가 쉬울까? 씨앗이 발아했다 해도 잎을 내고 싹이 돋았다 해도 다 팔다리 쭉쭉 내 뻗는 나 살았다, 나 살고 있다, 하는 詩에 서정과 함께 서사가 있다는 건 詩에 맛이 있다는 걸 거다.

시인의 전언傳言은 진 자리 마른 자리 바람과 햇살, 뿌리로 물을 빨아 올리고 계절이 바뀌고 찬란함을 향해 가는 우리들, 구불구불한 길 위에 다람쥐가 우리들의 어깨를 밟고 지나가고 천천히 희망의 나무, 사유의 나무가 되어 이 굴곡진 生의 숲을 가로질러 가는 나무로 헌신?하는 한 생애를 나무의 발성으로 하늘의 빈틈을 메워가는 나무를 묘출描出해 내는 것이다.

숲과 함께 숨 쉬고 우주를 구성하는 뭍생명, 물끄러미 바라보는 다람쥐. 그 도토리 개수와는 상관없이 함께 길을 열어가는 거친 숨결의 나무들. 뭘 그리 아둥바둥 살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시인은 결코 덧없다 말하지 않는다. 한 잎의 바람, 햇살, 봄의 한 그루 나무도 결코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나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얻어지는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생각의 숲 가장자리에 한참을 서서 한없이 긍정적인, 인내하는 시인의 나무를 바라본다. 시인의 아름다운 나무에서 푸드득 새 날아가는 소리도 듣는다. 이제 남은 生을 비워가는 것일까. 갑자기 시인이 좋아진다. 아니 옛날에도 박완호 시인의 발성에는 운율이 있어 착착 달라붙는 음성적 효과가 있었다.

새가 날아간 나뭇가지의 그 떨림처럼 박완호 시인의 시로 인해 요 몇 날 며칠 밤을 설렘과 감동의 나무가 되어 봄바람, 비에 흔들렸다. 그러다 시인이 시 마지막 구절을 나지막이 발성해본다. 시인은 다시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더는 아무것도 발음할 필요가 없는

바로 그 찰나, 나무는 비로소

한 그루 온전한 나무가 되는 것.

나-無라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천천히 발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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