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뿔을 잃다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3.05.09 09:00 의견 0

뿔을 잃다

우대식

마로니에는

내 죽은 女子와 테네시 윌리암을 보던

마로니에는

일각수(一角獸)가 웃으며 지나가고

서로 기다리다가

죽음에 도착한 사람들

마로니에는

사람들 모두 지워지고

나무 아래 당신과

나무 밖의 나와

연민의 눈빛을 지닌 일각수가 살던

마로니에는

단단한 뿔을 만지면서도 따듯했던

혜화동의 겨울

먼 나라 마로니에는

나무 아래 입술이 부르튼 당신과

나무 밖 당신의 발가락을 핥던 나와

뿔을 부끄러워하는 일각수가 살던 마로니에는

# 1999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단검』, 『설산 국경』, 『베두인의 물방울』 등. 저서 『죽은 시인들의 사회』, 『비극에 몸을 데인 시인들』, 『선생님과 함께 읽는 백석』 등. 『현대시학작품상』 수상. 현재 숭실대 문예창작과 강사.

# <뿔을 잃다.> 우대식 시인이 말하는 뿔은 뭘까?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있겠지?

젊음? 욕망? 청춘도 사랑도. 나도 코뿔소처럼 머리에 뿔 하나 장착하고 들이받던 마로니에의 추억이 있던가.

나무 아래 당신과

나무 밖의 나와

연민의 눈빛을 지닌 일각수가 살던

마로니에는

단단한 뿔을 만지면서도 따듯했던

혜화동의 겨울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지만 시대와 공간이 같은 경우가 많다. 혜화동, 마로니에로 대변되는 거리는 바로 대학로이다. 시인은 마로니에를 이야기하며, 마로니에에서 만났던 죽은 이를 떠올리며, 시인은 <입술이 부르튼 당신>이라는 절망과 <당신의 발가락을 핥던>이라는 환멸로 당대의 현실과 암울한 미래를 표현한다.

행복한 삶, 미래가 있는 세상. 우리는 늘 지각을 하지 않으려고 달렸다. 아부하지 않으려고 욕 먹고 살지 않으려고 먹고 자고 애써 견디고 버티며 일했다.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도태되지 않으려고. 그게 머리에 뿔이 되었던가. 그걸 욕망이라고 하는 건가?

그리고 시인은 묻는다. <넌 어땠니?>라고.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학림다방 뒷골목으로 해서 명륜시장으로 해서 명륜극장, 그리고 성대로 넘어가는 육교.

통금이 사라지고 차 없는 거리, 중년이라면 대학로는 차 없는 거리가 있던 거리로 워낙 유명했다. 젊은 날, 사랑과 열정이 있던 이들에게 그 대학로, 그 욕망의 거리(Desire Street), 대학로에 앉아 보지 않은 이 몇 있던가.

마로니에의 꽃말은 낭만과 정열이다. 일본 놈들이 심었던 말던 눈물 속에 봄비가 흘러내리든 말든 젊음이 환상이었을까, 욕망이 환상이었을까. 젊음의 꺼짐이 슬픔일까? 욕망의 꺼짐은 환멸일까?

시인은 왜 머리에 뿔 하나 달린 짐승으로 표기하고 부끄럽다, 했을까.

내게도 마로니에는 그런 곳이었다. 한쪽에서는 군사정권과 맞서 최루탄과 시위가 난무하고 한쪽에서는 차 없는 거리를 만들고, <사랑하라, 희망없이> <자유 없이 자유롭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춰라.> <그래 너희들 자유하지 않는가?>

지나친 음주와, 수많은 사건과 사고, 빈번한 강간 살인사건들로 결국 폐지가 된 문화의 거리. 낭만, 그리고 자유 없는 자유로 추억이 찬란하게 비추던 그 거리. 마로니에.

개방과 포용의 거리였던가. 시인이 말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말하고, 심지어 생각까지도 중요하다. 모든 것이 중요하고,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각인을 남기는가? 특히 되돌아보는 추억은 삶은 더 그렇다."고.

시인은 묘하게 뿔이라는 알레고리로 독자를 identification(동일시) 하게 만든다. 그 젊음의 한 시절을 일각수, 머리에 달린 한 뿔 달린 짐승으로 부끄럽다, 그 청춘의 들이받는 뿔을 시인은 오랜 시절이 지난 후에야 다시 만져보고 따스함으로 표현한다.

부끄럽다, 했지만 시인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거 같다. 시인의 나이 값으로 <부끄럽다>는 일각수, 그 한 뿔을 가지고 반추해 보면 부끄럽지만 가능성이 불쾌한 시대에 <살아냈다.> <당당하게> <넌 어땠는데? 나는 지금도 뿔이 돋아. 새 뿔이 돋는다?>로 들린다.

나무 아래 입술이 부르튼 당신과

나무 밖 당신의 발가락을 핥던 나와

뿔을 부끄러워하는 일각수가 살던 마로니에는

낭만적 환상과 그 어조의 고전적 비장미가 능수능란하다. 현실에 맞서는 고독한 영혼이 불가피하게 취하는 포즈는 불온해서 아름답기까지 하다. 지상의 삶에 대한 강력한 항의와 날카로운 부정의식이랄까?

지금도 마로니에는 비둘기들이 날고 있을까?

마로니에 아래 오손도손 뿔을 키우고 있을까.

급작스레 나도 부끄러워진다. 나도 대학로 길바닥에 승복을 입은 채 몇 번 앉은 적 있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다. 다시 마로니에에 가보고 싶다. 지금도 가끔 머리에 뿔이 돋는 지금. 지금도 마로니에가 피고 있는지. 과연 나의 청춘과 사랑은 어땠는지.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였던가?

마로니에 몇 번 역에서 내렸던가. 누구나 다 타고 내려야 하는 전차.

<뿔을 잃다>라는 마로니에號 라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였던가. 한편의 시로 하여금 결코 비겁하게 살아오지 않았다며, 눈을 깜빡여본다. 연일 봄 장마로 바람불고 비 오더니 비 그친 새벽이다.

이제 6번 출구에서 나와 중간도 넘고 7번 출구로 가는 즈음 시인이 뿔을 잃어버렸다는 데도 왜 나는 왜 애잔하지 않고 쓸쓸하지도 않을까. 시가 주는 힘일까?! 시를 읽으며 오히려 흐뭇해 하기까지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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