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노랑매미꽃 여자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3.05.16 09:00 의견 0

_무명의 시인에게

박 미 산

봄여름가을겨울이 한 호흡인 듯 시간 여행 중이던 그녀

만행을 삼 년씩 여덟 번 하고도 양손에 쥔 건 꼬깃꼬깃한 문장 몇 줄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 흔한 날갯짓 한 번도 하지 못한,

견고한 자세를 유지하고 그늘 읽기에 빠져버린 여인, 눈부신 사월의 햇살에 산그늘을 놓친다

햇빛에 사냥당한 노란 몸 푸른 잎에서 붉은 피가 흐른다

백담에 흐르는 여인의 빗장뼈가 하얗게 드러난다, 꽃이 진다

꽃 진자리에 수지침을 꽂으며 팔순 노모의 안부보다 형이상학을 돌보는 여자

어머니의 뿌리를 산그늘에 끌어 놓고 언제 배반할 줄 모르는 시 몇 편을 몸속에 넣는다

산이 크게 한숨을 쉰다 잠들었던 구름이 비를 부른다

음지에서 펄럭이던 낡은 글발이 쏟아진다

# 박미산 시인, 2006년 <유심> 시 등단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2012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루낭의 지도』 『태양의 혀』 『흰 당나귀를 만나 보셨나요』

2014년 11월 조지훈 상 수상, 2021년 5월 손곡문학상 수상

2017년 6월~2023년 2월까지 《세계일보》 「박미산의 마음을 여는 시」 연재

2021년 2월~현재까지 《환경미디어》 「박미산의 시시닷컴」 연재 중

# 살다보면 다시금 떠나지 않고는 어쩔수 없는 때가 있다. 삶은 여행이고 만행(萬行)이다. 존재하는 것과 그 존재하는 것 너머에 뭐가 있을까.

견고한 자세를 유지하고 그늘 읽기에 빠져버린 여인, 눈부신 사월의 햇살에 산그늘을 놓친다

햇빛에 사냥당한 노란 몸 푸른 잎에서 붉은 피가 흐른다

백담에 흐르는 여인의 빗장뼈가 하얗게 드러난다, 꽃이 진다

도시적인, 현실적인 삶에서 노랑매미꽃을 보기는 어렵다. 자연환경보존법에 의거해 환경부에서 보호하는 식물이다. 피나물을 노랑매미꽃이라 부르는데, 같으면서도 다르다.

시의 기법도 여느 시와 다르다. 직정적 토로의 독백조가 아니라 인생역정을 담담히 내다보는 관찰자 시점의 이야기(서사)를 꺼내드는 것이다.

노랑매미꽃, 4월에서 5월에 걸쳐, 높은 산지의 습기가 많은 계곡 주변을 거닐다 보면, 노랑매미꽃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만나기 쉽지 않다. 피나물 만나기는 쉽다. 그러나 피나물 중에서도 노랑매미꽃은 그렇지 않다. 매미꽃은 꽃줄기에 잎이 없지만 피나물은 꽃줄기에 잎을 달고 있다. 꽃모양은 거의 같다. 수술은 여러 개로 조각은 2개이고, 꽃잎은 4개인데 반짝반짝 빛이 나는 노란색이다.

귀한 노랑매미꽃이라는 자연정황과 시인의 삶의 모양과 대비시키는 것이다. 현대적 모더니즘이랄까, 시를 읽으며 와우, 했다.

어쩌다 백담까지 흘러들어 갔을까. 쓸쓸한 유랑이었을까?

이 시에서 이야기는 처음부터 시의 첫행에서 시간여행이라고 했다.

이야기는 언제나 과거로 부터 비롯되어 시작된다.

어머니의 뿌리를 산그늘에 끌어 놓고 언제 배반할 줄 모르는 시 몇 편을 몸속에 넣는다

산이 크게 한숨을 쉰다 잠들었던 구름이 비를 부른다

결국 시인은 완전한 수행자로 그 삶, 生을 관찰자적 시점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몸이 된 시들, 여전히 과거로부터 시작되지만 현재적 상황, 지금의 모습을 비춰주는 것이다.

시인으로 하여 나도 시간여행을 한 번 해보면,

오래 전 어느 한 무명시인을 만난 적 있다. 시인은 그 일을 잊고 살았겠지만, 내게 각인된 시인과의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승려 한 사람이 텐트를 치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일행과 함께 온 시인들을 위해 승려는 봉다리 싸구려 커피를 일회용 컵에 내어 놓았다. 티스푼도 없어 커피 봉다리를 접어 휘휘 저어주었다. 테이블이라야 전선줄을 감던 둥그런 나무를 해체해 테이블로 만들어 놓고 살던 시절이었다. 한데 일행 중 한 사람이 칠칠맞게 그 뜨거운 커피를 쏟았다. 그때였다. 시인이 테이블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커피를 손을 쑥 내밀어 손바닥으로 그 커피를 받아주는 거였다... 옆에 앉았던 승려의 무릎으로 떨어지는 그 뜨거운 커피를 손으로 받아 그 승려는 그 사이에 몸을 피해 승복에 얼룩지지 않게 되었고.

그리고 삼십 년이 지났다.

노랑매미꽃은 여러해살이풀로 꽃말은 봄나비이다. 그때 시인은 참 고왔다. 고단한 세월을 보낸 지금도 곱지만. 불가에 <사주보다는 관상이 관상보다 심성, 심상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시도 그렇다.

운명론적이고 회한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서 벗어나 생생한 이미지의 노랑매미꽃, 그 한 生을 기어이 찾아내고야 마는 시인. 마음이 비단같이 고와서 이제 할매가 되었는데도 곱다. 이 밤에도 잠 못 든 채 펄럭이는 우리들. 존재하는 것과 그 존재하는 것 너머에 뭐가 있을까. 꼬깃꼬깃한 문장 몇 줄? 낡은 글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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