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고백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3.05.23 09:35 의견 0

고백

이위발

몰래 눈물을 삼켰다

어머니는 아직도 몸속에 결을 품고 있었다

거미가 체중이 지치도록 거미줄을 풀어내듯

그 결을, 가슴에서 뽑아내고 싶었다

병실 틈으로 산란하게 기어드는 한 줄기 빛처럼

어둠의 복도를 따라 빛은 가늘게 뻗어나갔다

결 뭉치는 단단하게 뭉쳐졌다 풀어지면서 가볍고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그 결을 만지면서 허물어진 손등의 무수한 점들이 눈물로 희미하게 보였다

꼿꼿하게 누워 있는 어머니의 허리는 병원 옆 철길을 달리는 침목 같았다

오늘을 넘기기 힘들겠다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 전

어머니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귓볼로 어눌한 목소리가 전율로 흘러들었다

도마뱀이 몸속으로 기어 들어오듯 등골 서늘한 목소리

건너편 침대에 아배 눈을 닮은 곰 인형이

누군가를 하염없이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결이 녹아내리듯이 이승에서 마지막 내뱉는 그 울림은

허공을 하염없이 맴돌고 있었다

# 이위발 시인, 경북 영양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199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어느 모노드라마의 꿈』, 『바람이 머물지 않는 집』, 『지난밤에 내가 읽은 문장은 사람이었다』 등과 산문집 『된장 담그는 시인』, 평전 『이육사』가 있다.

# 시를 읽으며 울컥했다. 내 어머니는 권사님이셨다. 내 구순의 어머니 기도는 마지막에 <죽을 때 죽더라도 죽을 때까지 죽는 줄 모르고 죽게 해 주소서.>였다. 그런 어머니가 고통스레 돌아가신 아버님의 죽음을 함께 목격한 승려인 내게 <스님은 어때?>하고 물으셨다. <오늘 죽어도 좋고, 내일 죽으면 더 좋고. 사람들 죽는 거 많이 봤는데 죽을 때 알고 죽는 이들보다 죽을 때 모르고 죽는 이들이 더 많더라고.>

삶이란 죽음으로 가는 도정이다.

이위발 시인도 죽을 것이고 나도 죽을 것이다. 누가 죽음을 면할 수 있을런가. 우리들 운명을 지배하는 사랑과 죽음, 그리고 이별은 영원한 문학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동안 부모님의 은혜를 잊는다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문득 시인의 시를 읽다 어머님의 은혜란 노래를 떠올렸다. 어버이날의 노래는 <부모은중경>이란 경전에서 비롯되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 손발이 다닳도록 고생하시네 /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하리오 /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 고우시던 이마 위엔 주름이 가득 /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부모은중경>의 그 열 가지 내용은

첫째, 잉태하여 지켜주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둘째, 해산할 때 수고하신 은혜이니

셋째, 낳은 다음 모든 근심을 잊으신 은혜이니

넷째,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아 먹이신 은혜이니

다섯째, 아기는 마른 자리에 뉘고 자신은 진 자리에 눕는 은혜이니,

여섯째,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이니

일곱째,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주는 은혜이니

여덟째, 떨어져 있는 자식을 걱정하신 은혜이니

아홉째, 자식을 위해 몹쓸 짓도 감히 하신 은혜이니

열째, 끝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봄 바람결에 이제 우리는 효도할 수 없는 불효자, 부모님 앞에서는 누구나 죄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임종을 도마뱀이 몸속으로 기어 들어오는 듯 하다는 임종을 통한 한계의식, 또한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그 죽음을 넘어서기 위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시였다. 시인의 내면으로 흐르는 따스한 물결들.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던가?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네, 하며 이 세상을 사랑하며 살려해도 불가해한 삶 앞에 쓸쓸해하고 아슬아슬하기만 했던가. 삶이 무서웠던가.

고백치고는 지독한 고백이랄 수 밖에 없다.

세상에 떠밀려가는 삶, 그래도 매순간 최선을 다해 정진하며 살아왔다 했는데도 어머님, 아버님 영전 앞에서는 부끄러운 우리들, 살아남은 우리들이 기필코 감당해야 하는 남은 생, 끔찍하게 고독하지만 그래서 더 정신이 번뜩 들게 하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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