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만행(萬行), 진정한 여행

_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 가는 자가 아닌 것도 가지 않는다(용수)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4.08.06 09:00 | 최종 수정 2024.08.07 09:39 의견 0

진정한 여행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 때 비로소 진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1.

"저, 스님."

"응?"

"만행 좀 다녀오겠습니다."

"만행?"

老師가 되물었다.

누구에게나 터닝 포인트가 필요할 때가 있다. 어떤 상황이 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게 되는 계기, 또는 그 지점이 돌파구가 될 때가.

"......"

보일 듯 보이지 않았고 들릴 듯 들리지 않았다. 그때 법당 추녀의 풍경이 댕그렁 울었다.

"그럼 저 소리를 잡아올 수 있겠느냐?"

"......"

"그래, 지금 내 앞에서 만행 떠나겠다는 놈은 어떤 놈이냐?"

"......."

산문(山門)은 언제나 산문(山問)이었다. '그놈이 누굴까. 뭘까? 도대체 뭐지?' 하는데 老師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에게 한 물건 있다(吾有一物).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다(無頭無尾 無名無字).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지탱하며, 밝기는 대낮 같고 어둡기는 칠흑보다 더하다(上柱天下柱地 明如日黑似漆). 항상 행주좌와 움직이는 가운데 얻고자 하지만 얻지 못한다(常在動用中 收不得者). 이것은 무엇인고(是甚麽)?"

"......"

그저 산맛만 본 햇중으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시절이었다.

"만행 다녀와서 일러보아라."

그리고 老師와는 영 이별이었다.

2.

장마가 끝났다. 장마가 끝났는지 어찌 아느냐고? 매미가 울면 거개 장마는 끝났다. 체온을 넘나드는 열기로 무덥다. 그리고 습하다.

하여 '그래, 그 풍경소리는 잡았는가?' 내가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며 씩 웃었다. 순진하고 촌스러웠던 지난 날들이 떠올랐다.

장마 끝물로 날이 흐리고 해가 떴다, 흐렸다 비가 오다 말다, 하는 지랄 맞은 날이었다. 앉아있다보니 허리가 아팠다. 그래도 한때는 멧돌, 절구통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날이 궂은 날은 뼈마디가 쑤시곤 했다. 슬슬 '걸어볼까?'하며 길을 나서는데 발 사이로 풀이 밟혔다. 메뚜기가 놀라 폴짝 뛰었다. 자라라는 곡식은 자라지 않고. 꿍얼거리는데 문득 그때, 그 시절 첫 만행 떠나던 날이 떠올랐던 것이다. 섰는 곳마다 可함이 없던 시절이었다.

똥인지 된장인지, 소나기인지 천둥인지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하늘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고 땅이 어디 있는 지도 모르던 햇중시절이었다.

그저 절밥만 축내고 있다는 가슴 가득 괴로움을 안고 살다 심검당, 해탈문(解脫門)을 벗어나니 숨통이 조금 트이는 거 같았다. 해탈문이 내겐 해탈문이 아니라 지옥문만 같았다. 해탈문을 나와 불이문(不二門) 을 지나고 금강문을 벗어나 일주문(一柱門) 에 다다르자 '아싸'하는 콧노래가 나왔다.

"뭔 지랄로 산문(山門)엘 들었을까."

"불행해지면 절밥을 먹게 되는 기라."

3.

만행이 길어졌다. 봄인가 했더니 가을이었고 낙엽이 떨어지고 으실으실 추워졌다. 슬픔, 고통, 괴로움(苦)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불래불거(不來不去). 그저 세상 모든 건 인연따라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뿐이었다.

"야, 야, 야. 그런데 니는 도대체 어떤 놈이고?"

사람들은 숨가쁘게 어디론가들 가고 있었다. 어디로들 가는지.

뜨거운 꿈을 향해 가는 자만이 앞이든 뒤든 옆이든 갈 수 있었다. 내 손 내가 흔들며 다녔다. 절뚝거렸지만 느렸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송장은 걷지 못했다.

서울역에서 동자동, 옛날 수도공고가 있던 자리, 나중에 대일학원이 생겼던 곳으로 넘어가는 지하도였다. 한철 노숙을 했다. 새벽 두 시. 사방은 쥐죽은듯이 조용하고 쓸쓸하고 추웠다. 콜록콜록 기침을 토해냈다. 내 꼬락서니를 돌아보았다. 온 발가락은 물론 발바닥이 부르텄다. 물집 잡힌 걸 바늘로 쿡쿡 쑤셔도. 제대로 먹질 못해 삐쩍 말랐다. 그래도 목숨은 부지하고 있었다.

눈 푸르던 납자에서 볼품없이 여읜 얼굴(色)로 변했다. 누렇게 쪘다고나 할까. 느낌(受)도 달랐다. 생각(想)도 변했다. 절간에 있을 때와는 달리 행동했다. 주육어초(酒肉漁草)를 가리지 않았다. 막행막식(莫行莫食) 할 것도 없었다. 있으면 먹는 거고 그런데 없어서 못 먹었다. 얼굴이 누렇게 떴다. 인식(識)도 변해있었다.

경주에서부터 서울역까지의 여정이 버거웠던 모양이었다. '수행은 지금까지가 아니라 지금부터인데.'하며 비통하다는 듯 나는 한숨을 집어 삼켰다.

"삶의 의미가 있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어야 할텐데.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지하도 벽에 머리라도 찧고 싶었다. 벌떡 일어났다. '돌아갈까?'하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본들 의미가 없었다. 무상함에 지하를 빠져나와 갈월동 쪽을 향해 휘청휘청 걸었다. '가는 자를 왜 가지 않는 자라, 하는 걸까?' 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걸음을 우뚝 멈춰섰다.

노숙자 차림새의 중년의 사내 둘이 한 노인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노인이 가지고 있던 걸 모두 빼앗아 막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 노인이 울고 있었다. 서럽게 우는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왜 울어요?"

얼마나 크게 우는지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서."

"푸하하하."

갑자기 껄껄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울던 노인이 '이놈이 이 중놈이 미쳤나?'하는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하여 담벼락에 기대 울고 있는 노인에게 '무엇을 잃어버렸느냐?' 물었다.

"다 빼앗겼어요. 저에겐 이제 아무 것도 없어요."

한밤중에 노인의 울음이 다시 허공을 찢었다.

추접스런 그 울음소리와 함께 가로등에 비친 노인의 눈에는 눈물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지긋지긋해 왔던가. 자괴감과 모멸감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가 띵하게 아파왔다. 순간, 그때였다. 老師가 관음사 법당 추녀 끝에서 울던 풍경소리를 잡아오라, 했는데 마침내 그 풍경소리를 잡은 거 같았다.

나는 나도 메고 있던 등산 전문가용 커다란 배낭을 내려놓았다. 그동안 만행에 도움이 되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호주머니에 있던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다. 둘이는 한동안 말없이 담배연기를 허공에 날렸다.

그리고 나는 슬쩍 배낭을 노인에게로 밀었다. 속에 들었던 조래기(스님들이 어깨에 매고 다니는 작은 회색가방)만 빼고 다 넘겨 주었다.

배낭 속에는 도반에게 얻은 회색으로 된 오리털 파카 하나가 들어 있었다. 코펠과 스위스제 석유버너,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차단할 수 있는 고무판 , 세상을 바꿔보려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보려고 마트에서 산 라면 세 봉지. 쌀 두 되 가량, 너구리도 있었고 짜파게티도 하나 들어 있었다. 다 주었다. 나는 목욕탕에 들어갈 목욕비와 짜장면 곱빼기 한 그릇 사 먹을 돈만 남기고 다 주었다.

노인이 혼란스럽다는 표정이었다가 금세 '웬떡이냐?'하듯 횡재했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좋아서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데 그 얼굴이 너무 환했다.

"이제 부자죠?"

"그럼, 스님은?"

"저도 가야죠. 저 슬프고 망망하기만한 저 바다로요."

엉엉 울던 노인이 일어서서 내게 두 손을 모아 연신 감사하다, 며 합장배례를 해댔다.

차가운 바람이 귓전을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하늘에서는 비와 함께 진눈깨비가 후둑후둑 떨어져 내리던.

그날, 그렇게 내가 빈털터리, 내가 누구인지 알았던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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