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아직, 살아 황홀하다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4.07.30 09:00 의견 0

장마로 고추 탄저병 기미가 보였다. 마을 어르신이 락스를 뿌리라는데, 먹는 거에 그럴 수는 없고 부랴부랴 약을 구입해 뿌려주었다. 마을 어르신의 조언대로 급하게 이랑과 이랑사이 고랑에 잡초매트를 구해 깔았다.

그제는 번쩍 번쩍 내 머리 속으로 가슴으로 번개가 내리쳤다. 천둥과 벼락이 그렇게 밤과 함께 울었다. 물벼락, 물폭탄이 쏟아져 내렸다. 이번 장마는 내 생전에 한번도 보지도 겪지도 못했던 풍경들을 만들어 내곤했다. 집중폭우다.

"음,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혼자 고랑에 선 채 중얼거렸다. 하늘이 노했다는 걸 살면서 어제 오늘에야 느끼는 게 아니지만.

집은 마음이 있는 곳이다. 내 몸이 집이요, 내 몸이 고추밭이라 여기며 살았다. 허공이 산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흔들리는 불편함 속에 '도대체 언제까지 장마비가 쏟아질 거야'하며 뒤통수를 득득 긁었다.

오늘은 장마의 고랑과 같은 날로, 햇빛이 쨍쨍 내려 쬐었다. 고추 세번째 끈 묶어주는 날이다. 장마 기간이라도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은 펼펄 끓었다. 습도도 높고 또 뜨겁다.

탄저병은 잡은 거 같은데. 바람이 불기는 하는데 보통 찌는 날씨가 아니다. 끈적끈적하고 숨이 턱턱 막히기까지 한다. 수은주는 섭씨 36도에 육박하고.

하여 '오늘은 여기까지'하고 일단 밭으로 나와 그늘에 앉았다. 요즘 나는 느리다. 그리고 매사에 조심조심한다.

예보에 의하면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 했다. 그러나 예보와 달리 햇빛이 짱짱했다. 벌써 보름여 스콜처럼 쏟아붓는 비가 오락가락 했다.

오전에는 가랑비가 내리다가 자정이 되자 햇살이 쨍쨍 내려쬐더니 갑자기 먹구름을 드리우고 소나기가 한 차례 쏟아져 내렸다.

날씨의 변덕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런데 그제는 지독한 폭우였다. 절 올라오는 냇물, 웅천의 세월교가 물에 잠겼다. 그러다 물이 빠졌다. 세월교가 넘치면 물살이 세어져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매해 장마 때가 되면 쌀과 라면, 국수같은 식량과 연료을 미리 준비한다. 물이 넘치면 오가지 못하고 하늘만 바라봐야 하니까.

대방으로 돌아와 몸을 씻고나니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후끈대던 태양은 어디로 가고 검은 먹구름에 장대비가 쏟아져 내린다. 호우가 아니라 폭우다.

"비야, 제발 이제 그만 쏟아져라."

물벼락, 물폭탄으로 여기저기 물난리다. 물에 잠기고 산사태로 길이 끊기고 고립되고. 그때 핸드폰 전화벨이 울었다.

"폭우에 괜찮아요?"

나는 전화를 잘 하지 않는다. 함부로 인연을 맺지도 않고 지금까지의 인연에 순간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래도 이번 생 허투루 살진 않았나보다. 서울, 춘천, 강릉, 대전 서천. 심지어 바다 건너 제주에서까지.

갑자기 생이 즐거워졌다. 그냥 안부전화만 받았을 뿐인데.

인터넷으로 tv를 켰다. 장마는 언제나 끝나나, 라는 프로그램 화면속에는 과학자 한 분이 나와 초고온현상으로 더위로 북극과 남극의 남은 빙하가, 현재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녹아내고 있다고 한다.

그 과학자는 불교의 타파나 (Tapana), 초열지옥이 될 거라는 예언을 한다. 초열지옥은 불가에서 불길이 온몸에 휩싸여 견딜 수 없는 곳으로 8000여년 동안 고통이 지속될 것이라 했다. 결국은 말법(末法)이고 지구의 대멸종시대가 온다는 말이다.


"그런가, 그럴까?"하고 혼자 중얼거리는데 그때 전화가 또 울린다.

"그런데 스님, 저는 삽십 년 수행을 했는데 깨달음과 열반을 얻지 못했습니다."

수화기 저쪽 후배스님이 안부에 이어 너스레를 떤다.

"그래? 나는 오십 년 승복을 입었는데도 아직..... 깨달음과 열반을 얻지 못했는데."

내 말에 수화기 저쪽 스님이 피식 웃으며 '스님 행복하시고 자유로와 보이세요.'한다.

"그래? 나 행복하고 자유로우려고 스님이 되었어. 나는 그저 먹고 자고 기도하고 애써 일하고 전화를 걸어준 스님을 사랑할 뿐이야."

"......."

내 말에 수화기 저쪽에서 아무 말이 없다.

"그런데 말야, 그 깨달음과 열반의 경지가 제 아무리 고요하고 아름답고 편안한지 모르겠지만 그 열반의 상태에만 머물러 있으면 무슨 재밀까?"

"......"

나의 말에 후배가 말문이 막혔는지 아무 말 하지 못한다.

"그 깨달음이니 열반이니 하는 것도 다 번뇌망상이라고."

내가 말하자 후배스님은 후훗하고 웃는다.

"우리가 여행을 하다보면 도정에 길에서 몇 가지 것들을 잃지 않고는 아무도 그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어"

그래도 나는 열정 희망 감정 앞에 솔직하게 살았다. 통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한도 끝도 없을 거 같아 '아이고 허리야.'

하며, 전화를 끊었다.

비가 다시 쏟아져 내린다. 천지(天地)를 삼킬 듯이 어둠과 함께 장대비가 쏟아진다. 이건 비가 오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내리 쏟아 붓는 물폭탄 형국이다. 물벼락으로 물이 불어나 홍수주의보에서 경보로 바뀌었다. 물이 넘치고 산사태가 예상된다, 한다. 산사태주의보에서 경보로 심각으로 연신 문자가 울린다. 결국 저지대로 피하라는 문자다. 그러나 이미 길은 끊어지고 방법이 없다. 비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저 하늘만 쳐다볼 뿐이다.

백년에 한번 올 법한 비다. 기상이변, 더이상 이변이 아니란다. 극한 호우가 일상이 된 것이다. 갈수록 심각해질 것이라 한다. 괴로움을 떠나 어찌 즐거움을 얻을 것이며 번뇌를 떠나 어찌 보리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장마가 져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고 매일매일을 새롭게 시작하게 한다. 이제 장마는 일주일치 남았다 한다. 어찌되었든 장마라는 대상으로 몸과 마음으로 살며 생각하게 해주어 감사하다. 오늘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은 무엇이었던가.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다는 건 살아있다는 얘기다. 우리 중생들의 존재, 생노병사 우비고뇌 애오욕은 즐겁다. 그렇게 이번 생을 건너가는 우리는 하루라는 삶을 이겨내는 하루살이와 같은 나그네들이다. 그래서 매일매일이 기적이고 황홀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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