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소설 쓰는 것도 화장(化粧)하는 일이고 해탈(解脫)하는 일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4.08.21 11:10 의견 0

풍장(風葬) 1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거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바람과 놀게 해다오.

***

가깝고도 먼 여행이었다. 두 시간 정도의 거리라면 충분히 내가 차를 끌고 갈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가는 데만 네 시간 다섯 시간 거리였다. 평상시 같았으면 불가능했다. 그러나 마음을 냈다.

다행이 허물없는 벗들의 신세를 져야 했다. 갈 때는 인천에 사는 벗이랑 올 때는 절 가까이 그리고 멀리 살지만 밤늦도록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예술과 인생을 사랑하는 그런 벗들이었다.

문득 오고 가며 황동규 시인의 풍장이란 시를 생각했다. 마치 내가 詩의 내용처럼, 詩人이 찬 손목의 전자시계처럼 가죽가방에 넣어진 채로 벗의 차에 실려 바다로 내던져지러 가는 느낌이었다. 저녁공양까지 대접받고 무사히 여정을 마쳤다.

벗들과 헤어지고 식당에서 나와 터덜터덜 시외버스정류장 쪽 어두운 골목으로 내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걷는데 마침 건너편 식당에서 나오는 이가 '스니임.'하고 불렀다. 계동에 있는 중앙고등학교 후배였다.

"어찌 지내세요?"

"재밌게 살지."

원주 시외터미널 근처 밤거리는 황홀했다. 근처에 있는 대학에서 이제 막 전임을 차지했다고 했다. 모임이 있었고 회식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란다. 모 출판사의 편집장으로도 있던 이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힐끔거렸다. 밤 늦은 시간에 삐걱거리며 돌아다니는 빢빢머리에 승복때문일 거였다. 마침 서울로 올라가는 길인데 문막까지 바래다 주겠다, 했다. 버스를 타면 한참 걸릴텐데, 마침 잘 됐다, 했다.

'요즘도 글 쓰세요?"

"쓰려고 해.우리가 글판에서 만났잖아. 내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인연으로 박선생을 만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떤 쓸모가 있었을까? "

네온사인 불빛아래 후배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데 스님이세요, 소설가세요?"

"물론 나는 스님이지. 그저 소설을 좋아하는."

대답을 듣고 난 후배가 삐죽 입을 내밀었다.

"그런데 왜 문학을 하셨어요?"

후배는 반가움을 그렇게 표현했다.

"......, 나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건 조또 몰라. 너같이 문학이니 예술이니에 목 매달고 그걸 팔아먹고 사는 이들이 들으면 기가 찰 일이겠지만. 내게 소설은 그저 탁발이었어. 살려고 몸부림치고 발버둥이었달까."

거친 내 말에 한동안 후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스님은 왜 소설을 택하셨어요? 스님 글에 보니까 일체는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다, 라는 글이 있던데"

속으로 문학평론가 아니랄까봐, 화제가 왜 이래? 했지만 마음을 내어 문막까지 바래다 주는 이에게 또다시 질문을 무지를 순 없었다.

"소설은 이야기가 있어서 좋지 않아? 일체가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다, 라고 할 수 있잖아. "

".....네에. 말 되네요. 스님의 소설 반야심경에 보니까,우주는 시간적으로 시작도 끝도 없으며, 공간적으로는 한없이 무한하며, 여래는 즉 참나(眞我 진아)는 이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우주에서 생긴 적도 없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영생불멸하다. 참나는 언제 어디에나 있으므로, 티끌에도, 공기에도, 돌멩이에도, 담석(膽石)에도, 수레바퀴에도, 이끼에도, 염병에도, 학질에도, 문둥병에도, 에이즈 균에도, 에볼라 균에도, 암에도, 중음신(中陰身 pudgala)에도, 건달바(乾達婆 gandharva)에게도, 개(狗子)에게도, 잣나무(栢樹子)에도, 똥막대기(乾屎厥, 厠籌)에도 없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참나와 몸은 같다. 다시 말해, 우주 삼천대천세계는 참나다, 라는 구절이 있던데. "

후배의 말을 듣는데 갑자기 몸과 마음이 피곤해졌다.

"쓸 때마다 내가 하는 생각이 있어. 나는 이 이야기를 왜 하나? 뭘 쓸까? 할 때."

주제를 먼저 정했다. 결국은 삶이었다. 우리가 사는 얘기. 이야기, 주제가 정해지면 첫문장, 문체를 생각했다.


"청정 미묘한 법신이 두루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있으니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마음이 없으며, 마음이 부처이고,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으니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가 금생 나의 주제가 아닐까?"

"스님 소설의 주인공들은 거개가 구도자던데."

"내가 가장 많이 본 게 수행자들이니까. 그러니가 등장인물 설정이 그럴 수 밖에 더 있어? 소설은 결국 사람사는 얘기야. 내가 보고 겪은 게 절깐 사람들이야. 날더러 연애소설 쓰라면 난 못 써."

후배가 내 말에 피식 웃었다.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요. 중요하죠. 주제를 향해 도출해 내려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주인공의 캐릭터. 주인공의 내면과 일상, 그 사건과 사고를 통해 삶을 바라보는."

"그렇지. 갈등과 긴장을 만들어 설득력 있게 하기 위해서는. "

"스님이 소설을 쓰며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요?"

"왜 소설 쓰려고?"

"예....이번에 저도 하나 시작했어요. 그래서 스님에게 노하우를....."

"아무래도 글을 쓸 때 공들이지 않는 부분이 어딨냐.? 사진이 아니고 글로 표현해서 없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마음으로 보게끔 형상화 해야 하는데. 다 공을 들이지. 그래도 무엇보다 문장이겠지. 이야기가 아무렇게나 할 수 있잖아. 그런데 글은 조리가 있어야 하잖아. 나는 내 문장이 마음에 안 들어. 쓰고 나서 에이포 지에 프린해서 보면 절망하곤 해. 입으로 후 불면 훅 날아갈 듯한 문장들이야. 옛날부터 그랬어. 천재들처럼 한번 쓰고 끝,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어. 난 열번 스무번도 더 넘게 수정하는 편이야."

"스토리를 향한 문장, 문체, 전개, 구성. 작품의 서술방식으로 그 완성도를 위해서요?"

"그렇지. 작가의 땀과 노력의 결과라고. 대충 되는 건 하나도 없어. 작가의 치밀함 없이는 그렇지 않으면 공감과 공명을 얻을 수 없다고. "

"그러니까 스님이 이 때까지 살아남으신 거겠죠오..... 눈 먼 이들을 위해 단편소설들을 점자 책 찍으시는 봉사를 하시는 걸 보고 저 감동 먹었었어요. 그래서 스님을 좋아했구요. 승려로써의 생에 휘둘리지 않으시는 부분요. 그나저나 얼마나 더 쓰실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글쎄, 이번에 산문집 준비해. 장편하나 손 보고 있고 난 소설집 단편집이 아직 없어. 우선 숙제부터.... 할 수 있을 때까지 마지막이다, 하고 하는 거지 뭐. 오늘 죽어도 좋고, 내일 죽으면 더 좋고."

"스니임......!"

"어쩌면 그건 삶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아닐까? 그래서 소설 쓰는 것도 화장(化粧)하는 일이고 해탈(解脫)하는 일이야. 사는 게 다 피말리는 구도(求道)라니까. 이 땅에 시인은 많은데 소설가는 몇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그거야. 산 채로 풍장하는 건 중노동도 보통 중노동이 아니지. 그러니까, 내가 극장에 가면 깎아줘."

"......깍아준다고요?"

"그러엄. 극장에 가봐, 중고생 할인이라고 써 있잖아. 중 고생한다고 할인해 준대."

길은 멀고도 가까웠다. 크크크크 돌아와 보니 꿈이었나, 어깨 팔 다리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갑자기 살아온 날들이 아득해졌다. 그렇듯 낡고 허름한 내 주처는 온통 어둠과 안개에 휩싸여 있었고 어느덧 가을 바람이 불고 있었다. 쑤시는 걸 보니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날씨다. 얼마나 바람과 더 놀 수 있을런지.

저작권자 ⓒ 고양파주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