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불교계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인가’, ‘돈오점수(頓悟漸修)인가’라는 자유로운 논쟁을 벌여 재밌었던 적이 있다. 편견과 독단 없이 나는 그저 장외의 관중, 관객으로 그 양쪽 진영의 논쟁을 보면서 행복해 했던 적이 있다.
'돈오(頓悟)'는 단박에 깨닫는 것을 의미하고, '점수(漸修) '는 점진적인 수행을 말한다.
성철 스님은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보조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 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비롯됐다. “지눌의 돈오점수설은 깨치지 못한 거짓 선지식이 알음알이(知解)로 조작해 낸 잘못된 수행이론으로 알음알이는 깨달음을 이끌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돈오점수 사상을 신봉하는 자는 전부 지해종도(知解宗徒)이며 이단사설(異端邪說)에 현혹된 자들”이라고 몰아붙이기 까지 했던 것이다.
성철 스님에 따르면 ‘돈오돈수’의 의미는 깨침과 닦음이 점차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일시에 완성된다는 것으로 ‘궁극적 깨달음인 증오(證悟)를 위해서는 해오(解悟) 이후 점수(漸修)가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한다’는 지눌의 주장은 영원히 깨달음의 길을 등지는 자살행위라는 것이다. 이는 해오 이후의 닦음은 결국 증오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므로 그것은 증오를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업장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철 스님의 주장에 대해 처음으로 반론을 제기한 것은 이종익 박사였다. 이종익 박사는 「보조선과 화엄」(한국화엄사상연구, 1986)에서 “최근 모 선사(성철 스님)가 보조국사의 『법집별행록절요(法集別行錄節要)』의 첫머리 몇 줄만 보고 보조를 지해종도에 불과하며 그를 신봉하는 자도 지해종도라고 망언하는 것은 그의 문자식견(文字識見)을 크게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라며 “선사(禪師)도 편견·독단에 치우치면 그것은 불법의 큰 적(賊)이 된다는 점을 반성해야 할 것”이라며 성철 스님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종익 박사에 따르면 성철 스님은 보조국사의 저술을 제대로 읽지 못해, 보조 스님이 돈오점수만을 설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실제 보조 스님은 현생에 큰 발심을 낸 일반인(大心凡夫)에게는 일생동안 성불을 위해 수행을 해야 함을(頓悟圓修 一生成佛) 강조했고, 전생에 이어 오랜 기간 닦음을 이어온 이(宿世緣熟者)에게는 그 근기에 따라 돈오돈수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철 스님의 보조선에 대한 폄하는 잘못된 것이라 지적했다.
돈오원수((頓悟圓修)는 지눌이 원조는 아니고 원조는 화엄종 제5조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이다.
여기에 법정 스님은 「보조사상」1집(1987) 권두언을 통해 “중생계가 끝이 없는데 자기 혼자 돈오돈수로 그친다면 그것은 올바른 수행도 아니고, 지혜와 자비를 생명으로 대승보살이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성철 스님의 주장을 반박했다. 법정 스님은 “석가모니의 경우, 보리수 아래서의 깨달음은 돈오이고, 이후 45년간 교화활동으로 무수한 중생을 제도한 일은 점수에 해당 된다”며 “돈오점수를 자신의 형성과 중생의 구제로 풀이한다면 그것은 바로 알아야 바로 행할 수 있고, 그런 행의 완성이야말로 온전한 해탈이요 열반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윤원철 교수는 「선문정로의 수증론」에서 "성철 스님이 돈오 이전의 수행을 사실상 점적(漸的)인 개념으로 설명하면서도 점(漸)을 극하게 부정하는 것은 점차(漸次)를 인정하면 수행 단계 그 계위(階位) 하나하나에 의미와 가치를 둠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함정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며 "완전히 깨닫지 못한 범주에 속하는 경지가 아무리 고매하다고 해도 구경각(究竟覺)에 비춰보면 무가치함을 깨닫고 수행에 더욱 매진해야 함을 강조하기 의도"라고 밝혔다.
"성철 스님의 수행론을 두고 아무런 수행의 노력도 필요없다는 뜻이라거나 돈수를 단박에 닦아 마친다는 말의 어감을 흔히 오해해 '쉽다'는 뜻으로 생각함은 그릇된 것"이며 "성철 스님의 돈수란 돈오한 뒤에는 불각(不覺)의 수행방편이 필요 없음을 강조한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목정배 교수가 윤원철 교수를 지지하며 「선문정로의 돈오관」(1988)를 통해 “보조국사가 고려시대에 조계선을 중흥하는데 그 공로가 지대하더라도 원증돈오(圓證頓悟)와 거리가 있다면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선문정로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논쟁을 확대시켜 나갔다.
나는 이 논쟁을 보며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깨달음, 열반은 무엇이며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닦을 것인가? 그리고 나는 앞으로 어찌 살 것인가?”로 행복해 했던 적이 있었다. 더 행복했던 건 '돈오점수'나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돈점 양쪽 모두 수행을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라는 걸 전제로 깔았기 때문이었다.
낡고 빛바랜 오래된 일수장부 같은 수첩을 뒤적이다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오늘 사제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스님의 입장은 어떠신가?"물었다. "나는 교(敎)와 선(禪) 어느 것 하나도 버릴 마음이 없네, 그려."하니까 전화기 저쪽에서 "아, 맞다. 스님은 점오점수(漸悟漸修)를 주장하시는 편이죠?"하며 행복해 한다.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살았던지, "그래 어디 일구(一句)로 일러봐라?'하면 대답할 답이 없으니, 돌아보면 뜬구름을 잡으려 했던 세월, 우두커니 서서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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