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가끔 물어본다. 대답은 거개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답은 그렇게 둘로 직업과 존재에 대한 사랑의 깊이에 따라 경계가 나뉜다. 딱 잘라 말하면 나물인 경우와 밥인 경우다.
화두는 ‘말(話)보다 앞서는(頭) 것’을 뜻하는데, 말 그대로 생각이나 말을 떠올려내기 전에 사유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금세 그 깊이를 알 수 있다.
사는데 화두가 있는 삶과 화두가 없는 삶이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세 살 아이도 생각을 한다. 무뇌아가 아니라면 그 생각은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 다르다. 물론 천치 바보처럼 그냥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가 이 땅에 어떻게 살 것인가? 화두 아닐 수가 없다.
화두를 보면, 1700공안이라지만 분류해보면 생노병사의 존재과정 중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는가, 다. 그렇게 그 의문(의정)을 키워가는 것을 화두라 한다. 그렇게 삶을 잡고 놓고 밀고 당기며 사는 거, 그렇듯 마음을 보고(觀) 生을 참구하고 실천하는 것을 불가에선 선(禪)이라 한다.
선(禪)은 마음에 소 한 마리 키우는 것이다. 선(禪)은 상상력과 호기심, 창의력을 북돋워준다. 선(禪)은 마음을 닦는 것이다. 그 마음은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것이 없으며 못 할 게 없는 것이다. 삼계가 다 그 한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듯 마음은 그림 못 그릴 것이 없고, 꿈꾸지 못할 게 없으며 전지전능할 수 있는 게 바로 우리들 마음이다. 화두도 문답도 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선은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좌선이 집중하기는 좋지만, 행선(行禪)도 좋다. 일하며 할 수 있는 禪이다. 행선이라 하면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을 뜻한다.
천하만물(天下萬物)은 무비선(無非禪)이요, 세상만사(世上萬事)는 무비도(無非道)다.
禪은 화두공안만을 참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닥친 일과 앞을 가로막은 프로젝트를 해결하는 것이 생활禪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禪인 것이다.
禪은 실천이요, 체험인 것이다. 욕실에 물을 담가 놓고 들어가면 몸무게만큼 물이 욕실에서 빠져나가는 것이요, 둥그런 달걀을 세우려하면 한쪽 모서리를 탁 쳐서 세우면 되는 것이다.
선은 유레카(eureka), 알았다. 바로 이것이다, 발견인 동시에 체험인 것이다. 고정관념의 타파, 편견과 선입견에서의 탈피, 나만의 향기, 나만의 목소리, 나만의 문장, 나만의 독창성을 갖는 것이다.
깨달음, 해탈과 열반, 행복의 길을 모색하고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禪은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경이요( 內明者敬),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外斷者義)이다.
천경(千經), 그 만론(萬論)은 다 개뿔, 백문이 불여 일견이다. 아니다. 불여일식이다. 그렇다. 생사장야(生死長夜)의 긴 꿈에서 깨어나는 길이다. 허물을 벗은 매미처럼(金禪脫殼) 나비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살다 가려면 화두 하나 쯤 갖고 사는 게 옳다.
그렇다. 그렇다고 소 한 마리 잡았다고 세상 다 잡은 건 아니다.
나의 화두는 무엇이냐고? 남은 생 재미있게 잘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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