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인연이 되어 푸릇푸릇한 청산에까지 기어올라와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산짐승, 곤충들과 머루랑 다래랑 사는 참 기이한 인연이다.
산자드락에 들어와 내가 떠받들고 사는 당신이 젊은 날에는 그리도 끔찍할 때가 많았다. 하도 끔찍해 몇 번이나 산을 내려갔는지 모른다. 세상엔 강도 있었고 바다도 있었다. 왜 이렇게 살아, 하고 하산했지만 그런데 어찌 다시 산으로 올라와 한평생을 살았다.
산에 올라보니 스님들이라고 거개가 얼굴이 백납같았다. 곡 부황 든 얼굴로. 거기다 인간미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때는 산중이고 저자거리고 간에 너나없이 끼니가 부족했던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불행해지면 절밥을 먹게 되는 거야."
그 말을 수없이 들었는데도 내 입은 댓발이나 튀어 나와 있었다. 스님네들은 하심을 내걸고 업을 닦으라며 끊임없이 희생과 봉사를 강요했다.
"가고 싶으면 언제라도 산을 내려가. 가는 사람 붙잡지 않고 오는 사람 반기는 곳이 절집이라고."
그랬다. 누구도 내게 산길을 오르라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듯 산을 오르락 내리락 많은 이들이 행자로 들어오지만 정작 산에 남는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산이 머물 사람과 떠날 사람을 걸러 준다는 거였다. 고되고 힘든 산생활을 할 수 있는 근기를 산이 시험한대나.
그렇게 어린 날 어스름에 궁시렁거려보았지만 이 날 이때까지 산을 떠나지 못하고 허리가 뚜둑거릴 때까지 파닥거리는 걸 보면 산팔자는 분명 산팔자인 모양이다.
그랬다. 어릴 적에는 산의 멋과 맛을 몰랐다. 죽어라 공부만했고 죽어라 참선만 했으며 죽어라 울력만 했다.
그러던 하루, 노스님은 나를 데리고 밭으로 가셨다.
"이게 씨다."
".....씨요?"
봄이면 열무, 상추, 고추 심었다. 삽으로 흙을 일궈 이랑과 고랑을 만들었다. 콩도 심고 팥도 토마토도 오이도 가지도 심었다. 물을 주었고 풀을 매주니 불쑥불쑥 채마밭에 채소들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봄이 깊어갈수록 채소들은 그 잔가지며 잎을 바람에 흔들어대곤 했다.
"스님, 침입하시는 거예요?"
"아니, 포식. 그렇지만 자연이랑 나누어 먹고 공생하자는 거야."
산중식구들이 맛나게 쌈을 싸서 먹었다. 그 모양을 보면 참 좋았다.
"넌 요즘 불만이 많아 보이던데."
"네. 공장에 가서 기술을 배울까, 아님 유명한 도둑놈을 찾아가 도둑질을 배울까, 궁리 중이에요."
".....그런데 왜 안 내려가?"
"은사스님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기다려서 뭐하게?"
"대학을 보내주신다고 했는데 우리 절, 이 코딱지만한 살림에 개코나 대학을 가겠어요? 하여 은사스님 만나면 이것도 인연인데 인사나 하고 내려가려고요."
나는 나지막이 신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니가 벌어서 모아서 공부해서 대학엘 가겠다고? 장하구나. 그런데 좀 더 기다려보렴, 그런데 기다리는 것도 그냥 기다려서는 안된다."
그때는 몰랐다. 은사스님이 무문관에 들어가셨다는 걸. 그리고 폐암이라는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걸. 그렇게 노스님이 나의 슬픔을 덮어주고 계시다는 걸.
"생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 해. 그냥 기다리리는 게 아니라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서서 기다려.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으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래 기다리다 보면 알게 되더라. 기다림이 사는 거더라고."
"그게 믿음이고 희망이라고 요?"
"응, 그 대신 기다리는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기다리다가 죽어버리게 되면 요?"
"그럼 그것도 한 생이겠지 뭐. 그런데 명심할 건 우리가 기다리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살기 위해 태어난 거라고."
"....."
" 너는 불연(佛緣)에 감사해야 해."
".....네?"
"니 은사 놈이 안 오면 내가 보내주면 되잖아."
"......"
노스님이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을 휘리릭 던지셨다. 감격했다. 그러나 훗날, 사형이 보시금 모아 두었던 가방, 그 통장과 도장을 홀라당 훔쳐가버렸지만.
"그러니까, 산에서 살려면 겸손해야 해."
"겸손이 뭔데요?"
나의 말에 노스님이 입을 실룩이시다 뻥끗 웃었다.
"자연과 이 숲, 이 산을 사랑하듯 네가 너를 사랑해야지. 사람이 부처인 게여."
".....네?"
그랬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 삼킬래야 삼킬 수 없었고 뱉을래야 뱉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가슴만 답답했고 애가 타서 쩔쩔 맬 뿐이었다.
산 속에서도 산 아래에서도 이 쪽 저 쪽과 어울리지 못했다. 밭고랑에 앉아보니, 늙은 노송이 내게 말한다. '그래도 산은 산은 살만한 곳이죠?'하고. 시시비비 따질 일없다. 잘했니 잘못했니 선악미추도 다 소용없었다. 노송이 그늘을 만들어 주며 하는 말에 소나무 잣나무 상수리 나무들이 잔가지를 흔들며 웃었다.
그랬다. 수행자, 자유인이 아니고 그저 세속을 피해 도피한 자연인처럼 낫으로 옥수수밭 대를 잘라주고 그 사이사이 배추모종을 심었다. 먹을만큼만. 자급의 무우 씨를 뿌렸으며 자족의 달랑무 씨도 뿌렸다.
"그래, 어디로 가려느냐?"
"어디까지든 행각하려 합니다."
"무엇을 위한 행각이냐?'
"아직은 모릅니다."
지금 같으면 '산따라 물따라 가겠습니다. 온 천하가 바로 저의 몸입니다(盡大地是汝自己).'했을 텐데, 하며 씻으려고 웃도리를 벗다가.
목욕실 창문으로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흰구름을 보았다. 그 흰 구름 위에 지팡이를 안고 앉아계신 노스님이 '남의 말만 따라가다가 잘못 되는 법이다. 아직도 말에 막히고 구절에 걸리는 천치바보 같은 놈아. 청산이 좋아 청산에서 산다, 고? 지랄하고 자빠졌다. 천지가 네놈과 더불어 원래 근본(天地與我同根)이었거늘......아직도 온 천하가 있고 그 안에 네 놈이 있더냐? 아이고 이 절밥 도둑놈아.'하시며 혀를 끌끌 차시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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