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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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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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제아무리 발버둥쳐 봤자 지나갔다. 지난 여름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날씨였다.
고백하는데 내게는 지병이 있다. 기흉이라 한다. 기후위기로 하늘을 노려보고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바보 같은 표정을 하고 섰던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삽십 도가 넘는 무더위로 숨 쉬기가 버거웠다. 낮에는 더위로 비실비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때도 있었다. 어쩌다 천식을 앓게 되었는지. 숨이 가빠지면 오금이 저리고 난데없이 오줌을 찔끔거릴 때도 있었다. 하여 나는 행동이 굼뜨다. 항상 조심조심, 느릿느릿이다.
오래 전, 크게 교통사고가 났을 때, 갈비뼈 몇 개가 폐를 찔러 급하게 수술을 하고 난 이후 후유증으로 발생한 병이다. 그리하여 병은 남은 생, 평생 안고 가야 할 도반이 되었다. 그렇게 좋아했던 담배와 곡차를 끊게 된 것도 다 그놈의 지병 때문이었다. 내 生의 길흉(吉凶)과 화복(禍福)도 다 내 것인 거였다.
여튼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게 농사였다. 내게 농사는 운동이었다. 땅을 갈고 퇴비를 넣고 씨앗을 뿌리는 일들이 재밌었다. 농사를 짓게 되면 외로움도 설움도 걷어낼 수 있었고 몸도 튼튼해져 건강해질 수 있는 거였다. 지금도 나는 육 개월 마다 폐기능 검사를 한다.
이젠 농사라 해봐야 텃밭 농사 정도지만, 한때는 농부스님이란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우 목숨 하나 부지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만큼의 자급농, 자작농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올 해 고추농사는 백 이십 근 정도는 한 거 같다. 그렇게 약해 빠진 몸을 델꼬 새벽,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고추를 따곤 했다. 김장하고 일 년 먹을 고추장 담으면 끝이다. 절에 올라오는 본격 농사꾼들인 마을 벗들이 나를 보고 볼 때마다 '애쓰셨네'하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러면 나는 '나는 나를 볼 때마다 불쌍해 죽겠는데' 하며 피식 웃는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죽을 때 그 돈 짊어지고 가는 사람 보지 못했다. 이제 고추밭에 달린 고추들은 따서 간장에 삭힌 고추지를 담으면 되고 고구마 밭의 고구마만 캐면 올 농사는 끝난다.
프린트를 하려는데 A4지가 얼만 남지 않았다. 하여 내친 김에 장에 나가려는데 마을 노보살님이 길목에서 나를 보고 소리쳐 부르신다.
"스님, 이거."
노보살님이 양파자루 하나를 내민다.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마늘이다.
"어여 받아. 항암마늘이래. 심어봐."
"중한테 마늘을 주면 어쩌라고요?"
"중노릇도 힘이 있어야 하는 겨. 삼계가 다 마음 안에 있는 거라고. 먹어봐 끝내줘."
웃음지으며 마늘 씨를 내미는 노보살님의 말씀에 어이가 없어 낄낄대며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마늘자루를 받았다.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로 표현하지 못할 행복 같기도 하고 기쁨 같기도 한 것이 솟아 올랐다. 올해 농사가 끝났는 줄 알았는데 자루를 들어보니 그 양이 꽤 된다. "삼계가 다 마음 안에 있는 거라고?" 읍내로 나가며 노보살의 법문을 입으로 주워 삼키는데, 왜 그리 행복한 것인지. 하다하다 승려가 고추농사에 이어 올해에는 아무래도 마늘까지 심어야 농사가 끝이 날듯 싶다.
그랬다. 어드메뇨, 열반피안 거기련가. 몽환 꿈결 속의 거룩거룩 거룩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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