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딩동댕, 나의 틀니 이야기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5.01.10 10:50 의견 0

나는 틀딱이다. 윗니는 완전 틀니다. 그렇다. 가끔 틀니를 딱딱거린다.

나이가 들면 신체 곳곳에서 변화가 찾아온다. 청력이 저하되고 저작력이 약해지는가 하면 균형 감각도 둔해진다. 베이비 부머 시대에 태어난 나는 대한민국 국민 다섯 명 중 하나, 노인세대에 속한다.

「틀딱」은 최근 몇 년전 젊은 층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는 신조어로, 「틀니를 딱딱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젊은이들이 비꼬는 의미로 사용되며, 세대 간의 의견 차이나 갈등을 표현할 때 자주 쓰인다.

그래도 아랫니는 4개가 남아 부분 틀니다. 그런데 오래 착용했더니 틀니가 말썽부리기 시작했다. 헐렁해져 자꾸 빠지는 거다. 틀니를 빼면 합죽이가 된다.

염불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면 발음도 샌다. 하지만 의사소통하는 데는 지장 없다. 하지만 가는귀가 약간 멀은 상태에서 틀니까지 속을 썩이자 마음이 꿀꿀해졌다.

“뭐해요?”

마침 옛날에 같이 노래부르던 보살에게 전화가 왔다.

“옛날 우리가 입맞춤하던 시절 생각해.”

내 말에 수화기 저쪽에서 킥킥대고 웃었다. 평생 중학교 음악교사로 교직에 있던 대학동창이었다.

“키스해주세요~ 앞 이빨이 쏙 빠지도록~ 껴안아주세요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느닷없이 수화기 저쪽에서 소프라노로 노래를 부른다. 갑자기 어깨춤이라도 추는 듯 음정이 흔들리기도 했다.

나는 ‘크으. 보살아. 젊게 사는 거야? 이놈의 할망구 노망이 난 거야?’하며 나도 따라 흐물흐물 웃었다.

법무부 교정위원을 한 십년 했다. 교화위원이라 하기도 하는데 그 시절 소년원 아이들에게 법회를 마치면 이어지는 시간에 시와 소설은 내가 맡고 그녀에겐 싱어롱 시간을 맡기곤 했다. 그때 이중창, 듀엣으로 노래를 부를 때 바리톤인 내가 멜로디를 맡고 그녀가 화음을 주로 맡았다. 우리가 노래연습을 할 때 입을 맞춘다, 몸을 맞춘다, 하며 서로 농담을 하곤 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가 주로 불렀던 노래는 향수, 꿈의 대화, 이제하 선생님의 모란동백, 정호승의 이별노래, 저 바다에 누워, 같은 곡들이었다.

“…이제 나는 입을 못 맞춰.”

“…왜요?”

보나마나 말라깽이 그녀는 평소 같았으면 눈을 하얗게 흘겼을 것이다,

“…틀니 빠질까봐.”

말을 해놓고 보니 마음이 아릿했다.

“히잉…. 빠지면 쫌 어때요? 잇몸은 있잖아요.”

수화기 저쪽에서 나의 기색을 살피다 내던진 보살의 말에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렇게 낄낄대다 전화를 끊었다.


그랬다. 이가 없으니 잇몸으로 살았다. 혼자 있을 때는 불편함에 틀니를 빼놓아 합죽이로 지내다 산 밑에서 차 소리가 들리면 세정액에 담긴 틀니를 잽싸게 착용하곤 했다. 그런데 잇몸에 염증이 생겼는지 통증이 장난이 아니었다.

틀니를 끼고 뺄 때 아팠다. 통증에 휘둘려 창백한 얼굴을 하고 우거지상을 쓰면서도 치과에는 가기 싫었다. 잇몸이 아프니 머릿속이 하얘졌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원고 말고 다른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염증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부어서 구강상태의 변화가 심하네요.”

된장할, 죽도 씹어 먹어야 맛있는데.... 그래도 틀니로 세상을 씹고 맛보는 즐거움을 느꼈건만. 틀니를 오래 사용해 잇몸뼈가 군데군데 무너 앉았다는 거다. 틀니와 잇몸 사이의 벌어진 틈으로 음식물이 끼어 잇몸에 염증이 생겼다는 것이다.

의사는 무지막지하게 날카로운 것으로 상처를 헤집어냈다. 나는 부르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검진결과 이제 사용하던 틀니는 불가능하고 잇몸에 인공뼈를 집어넣어 임플란트를 몇 군데 박아 그곳에 틀니를 걸어야 한단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어 두 개는 삼십 프로만 부담하면 된단다.

살다보니, 먹는 즐거움보다 좋은 게 없었는데. 어쩌다 이지경까지 왔단 말인가. 부은 얼굴로 치과를 나와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피묻은 침을 꿀꺽 삼켰다.

찬바람이 얼굴을 싹 핥고 지나갔다. 영하 12도.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추워도 왜 그리 배가 고픈지 마침 눈에 보이는 중국집을 보고 망설였다. 한 시간 있다가 음식물을 섭취하라 했는데.

문득 '나 이렇게 살아 뭘 하려는 거지?'하다 죠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떠올렸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happened.」 직역하면 이곳에 있을 만큼 있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 쯤 되는 말이다. 그런데 누가 의역했는지 그 의역은 아주 詩的이고 삼삼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였다.

의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내 사는 읍내의 짜장면은 맛이 없었다. 하여 중국집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낮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며 짜장을 먹을까? 간짜장을 먹을까? 하다 부드럽게 짜장을 시키고 멍 때리며 앉았는데 전화가 왔다. 둘째 상좌 놈이었다.

“...뭐하세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투였다.

“그걸 알아서 네놈이 뭐 하려고?”

"…엄마에게 전화 받았어요."

"지랄."

나도 모르게 불퉁스런 대답이 나왔다. 멋쩍어졌는지 둘째 놈이 머뭇거렸다. 결국, 의료보험이 되는 두 개는 내가, 큰 상좌가 세 개, 둘째 놈이 네 개. 네 개는 노래를 함께 부르던 보살이 책임지기로 했단다. 노래보살은 둘째 상좌놈의 엄마였던 것이다.

저 사공이 나를 태우고 노 저어 떠나면 또 다른 나루에 내리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통화를 끝내고나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원주 터미널 옆의 짜장면이 얼마나 맛있던지.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를 끼고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을 먹으며 속으로 노래를 흥얼 흥얼거리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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