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로록 봄이 왔다. 바람 불고 꽃피는 봄이라는 계절은 왔건 마는. 진정 봄은 오다 바다에 꼬로록 빠졌는지 정녕 봄은 오지 않았다.

나는 좀 괴팍한 노인네다. 안 죽었다. 못 죽었다. 죽어야지, 하면서도. 빨리 이놈의 세상 건너가야지, 했는데 어찌 살아남아 호로록 늙는 동안 죽지 않고 골골대며 살았다.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봄을 맞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매년 법당 앞에 매화 목련 피고 진달래 피어 피어 산불이 타오르고 마음도 타올랐다.

산중에서 세상이 나를 어찌 보는지, 내가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는 상관 하지 않고 살았다. 자유인이 되고 싶었으니까. 외롭고 쓸쓸했다. 그래 괴로워도 좋아, 괜찮아, 하며 가까이 오지 마, 내게 손 내밀지 마, 했다.

<함께 한다고 관계가 좋다고 다 좋은 건 아니에요.>

<뭐, 인마?>

<그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순 없다 하셨죠?>

<......>

외로움과 초조함 속에 가쁜 숨을 내뿜었다. 헌데, 이번엔 둘째 상좌놈이 와서 나를 설득하는 거였다. 큰놈은 끝까지 단독자로 살고자 하는 내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던 모양이었다.

<스님?>

<응?>

<제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인줄 아세요?>

겸연쩍어 하던 상좌놈과 눈을 마주쳤다.

<그걸 내가 어찌 아누?>

<스님이랑 사형이랑 고추밭에서 고추 따고 셋이서 땀에 범벅이 되어 짜장면에 탕수육, 그리고 소주 한잔, 그렇게 곡차 마실 때요.>


둘이 다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승가대는 등록금이 한 학기에 백만원 정도였고 동대를 갔으면 장학금을 둘 다 받을 수 있었는데 한 놈은 미학과였고 한 놈은 희한하게도 전공이 화공생명공학과라는 과였다.

상좌 두 놈 등록금을 대주려면 학기마다 허리가 휘었다. 밤새 글을 썼고 낮에는 마을에 노는 밭, 천 오백 여평을 빌려 고추농사까지 했다. 셋이 중인지 농사꾼인지 평일은 물론이고 토요일, 일요일만 되면 죽어라 일했다. 상좌인지 깻묵덩어리인지 허우적거리며 겨우 두 놈을 졸업시킬 수 있었다.

<그때, 스님이 끝까지 나를 믿어줄 사람은 저 밖에 없다고 했어요. 혼자 잘 설 수 있어야 함께도 잘 설 수 있다고요.>

<......내가 그랬어? 내가 꽤나 지랄을 떨은 거지?!>

야윈 뺨, 콧대가 높은 상좌가 조심스레 구차하고 한스럽고 눈물겨웠다는 나의 한숨에 기색을 살피더니 <괴로움을 넘어 고뇌를 넘어 같이 살자시던 몸부림이셨죠.> 하다

<수행은 선즉농(禪則農), 농즉선(農則禪)이다. 예즉농(藝則農)이면, 농즉예(農則藝)라 하셨어요. ......올 해 농사를 짓지 않으신다고 요? 전 스님캉 농즉생(農即生)하며 쪼매 더 살고 싶은 데요.>

<.....크으.>

말을 끝낸 상좌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하여 다시 사래 긴 밭을 내다보다, 둘이는 삽과 낫을 들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산뜻한 이 봄날들은 분명 갈 것이고 꽃은 작년처럼 질 것이라는 걸. 봄날 속절없이 밭을 갈다 저물녘에 기침을 터트리고 말았다. 꽃 봄, 그 바람에 번져가는 산불이 잔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봄으로 내딛는 만물의 한 걸음 한 걸음 모든 것에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작은 산 다랑이 계단밭, 늘 자급자족 하던 농(農)이었다.

<아니 다들, 우리 나이가 되면 농사를 줄이는데 이놈의 절은 어찌 된 게 농사가 날로 늘어?>

도반이 지나다 들러 <행복한 절이로군?!>하며 지청구를 했다.

<역행이라고 알란가? 인생 삼모작이라고.>

내 말에 차가운 인상인 도반은 가느스름한 눈으로 한참이나 나를 쏘아보다 실소를 머금었다.

이기고 지는 것이 없었다.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는 생이었다. 결코 산을 등에 지고 살려 한 적도 없었다. 그랬다. 삐걱거리며 살았지만 밤 아니면 낮이었다.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고 저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너희는 모두 꽃이기에, 피어날 자격이 있어, 하고 중얼거렸다. 세상은 그렇게 신비와 마법 기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꽃이 피고 지고 봄에 씨뿌려 가을에 추수하는 건 그저 놀라운 일들이었다.

<이 하늘, 우리가 사는 이 땅 소중한 줄 알면 그게 수행인 거여. 스님도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자유를 평화를 위해 기도해 보라고.>

그러자 <희망이라 꿈이라? 사랑이라, 아이고 중아. 그게 다 헛것이고 가짜 행복이라고. 자아, 내가 진짜 행복을 줄 게. 나가자고 짜장면 살 터이니.>

<오래된 미래>보다 <더 나은 미래>라는 도반의 말에 한참이나 킥킥대며 웃었다. 그때, 샘에서 나오는 샘물이 산 밑 무심천이라 불리기도 하고 곰이 산에서 내려와 놀다 가 웅천이라 불리기도 하는 냇물로 쪼르륵 쪼르륵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