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뭇없이 돌아서다
― 어느 별에서
김이하
생의 중간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티끌로 사라지는 나를
찾지 마라, 다시 부르지 마라
이게 무슨 일이었냐고, 끔찍한 암전(暗轉)
가위눌린 꿈들이 겹겹이 쌓이는
어느 별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이름들
등에 업은 아이 찾듯 허둥거리며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이상한 거리
나는 어디에도 없던 그 날
사이렌이 삼킨 침묵 사이로 간신히 터진 한숨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담뱃불 끔벅이듯
밤하늘 별빛만 제자리를 맴돌고
멀뚱한 눈을 훑고 가는 경광등 불빛 뒤에
모든 게 멈춰 버린 찰나
이게 무슨 일이냐고, 모든 게 아수라장으로 바뀐
아스라한 삶의 뒷면
이제는 내 기쁨에도 슬픔에도 없고
멍한 기억에도 남지 않을 소박한 꿈 하나
그 꿈마저 증발한 접시는 광막한 시간에 갇히고
나는 돌아간다, 다시는 오지 못할 곳으로
나를 몰수당한 거리, 소름 끼친 환영(幻影)만 남기고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없이
깃털 같은 무게도 없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나를
다시 부르지 마라, 그 별에
티끌 같은 아픔도 새기지 마라
김이하/1959년 전북 진안 출생. 1989년 《동양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타박타박』, 『춘정, 火』, 『눈물에 금이 갔다』, 『그냥, 그래』, 『목을 꺾어 슬픔을 죽이다』가 있음. 사진전 <병신무란 하야祭>, <씨앗페>, <걷다_날다_외치다> 참여, 개인전 <시인이 만난 사람들>, <홍제천>. yiha59@daum.net/010-4120-7116
# 못찾겠다, 꾀꼬리. 우리들의 이름은 변두리였다. 오리무중이라고도 했다. 문학이 좋았다. 이물없이 지냈지만 총살 당할 것 같은 시대였다. 아무 얘기나 늘어놓고 시덥찮게 군시렁거리며 낄낄대기도 했다.
소설을 쓰던 박정요는 병으로 죽었고 정원(용연)스님은 민주화, 사회대개혁을 외치며 광화문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또 어떤 친구는 알코올 중독으로 폐인이 되어 행방불명이 되었다.
비싼 안주를 시켜놓지 못했다. 춥고 을씨년스런 청춘들이 피맛골이나 대학로를 헤매던 슬픈 나라에 슬펐던 청춘들이었다. 지구별 마로니에 그 나뭇가지 아래 앉았을 때 무엇이 그리도 뼈가 시릴만큼 고통스러웠을까.
이번 생,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가뭇없이 돌아서 보면, 사바세계라는 무대, 무엇이 그리도 목이 말랐던가. 머리 아프고 가슴 아팠던지. 그래도 멋지게 살았던가. 산다는 건 무엇이고 죽는다는 건 무엇인지.
번뇌는 깊어 밑이 없었고 생사의 바다는 끝이 없었다. 각자의 배를 타고 나름 고통의 바다를 건너왔는데 언제나 새벽같이 아직도 잠에서 깨는 이유는 무엇일까.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어라, 했거늘. 사유(思惟)의 허공 속에서 존재의 바닷 속에서 머무는 곳이 없으면 붙잡을 것도 없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