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고 바람부는 날이면 생각나는 이가 있다. 생각만 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를 만난 건 하늘재가 있는 산이었다. 하안거 해제, 산철이 되어도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본방, 도반 스님의 방에서 머무적 대고 있던 시절이었다.
아침공양을 하고 지칠 때까지 산을 오르고 내리는 게 그때 나의 일과였다.
아침공양을 하고 막 산을 오르려 하는데 산 초입에 희끗한 그 무엇이 보였다. 비가 내리는 이른 이 시간에 무슨 등산객? 했는데 내 또래의 스님 한 분이 쓰러져 있는 거였다.
"스님?"
"배가 아파 죽을 거 같아요."
배를 움켜쥔 채 웅크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스님을 들쳐 업었다. 겨우 산을 내려오니 마침 절로 올라 오는 택시가 있었다. 그렇게 시내에 있는 응급실로 달려가니 맹장이 터졌다는 거였다.
"수술해 주세요."
급하게 나는 허리끈에서 지갑을 꺼냈다. 이상한 나라였다. 목숨이 위태롭다고 빨리 수술해야 한다면서 응급실 한쪽에 붙어 있는 원무과 창구에서 빨갛고 파란 영수증들을 일차 수납 하지 않으면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그때 처음 알았다. 맹장염이 터지면 복막염이 된다는 걸. 혈액검사, 소변검사를 했고 복부ct를 찍어야 한다, 해서 그렇게 했다. 하여튼 대장을 절제 해 충수돌기에 관을 꽂고, 어느 정도 고름을 뺀 다음에야 맹장수술을 진행할 수 있다 했다.
내겐 피 같은 돈이었다. 그러나 사람 목숨이 더 중했다. 한달 여를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하여 나는 일주일 정도 병간호를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오는 날이었다.
"스님, 칼국수가 먹고 싶어요."
"뭐?"
'못된 놈 같으니라고. 물에 빠진 거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지. 고맙다는 말은 없고 비가 저리도 오는데, 꿍얼거렸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그새 정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죠? 스님."
후배 스님은 어느 정도 거동할 수 있게 되었다.
".....뭘?"
내가 떠나려 하자 침대에 누운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스님이 내주신 병원비 갚을 돈이 없어요."
"신경쓰지 말아. 스님이나 나나 雲水, 불알 두 쪽 만 가지고 입산 한 걸, 뭐. 스님이나 나나 빈 손으로 왔다 빈 손으로 가는 나그네인 걸 뭐."
"....스님, 감사합니다. 은혜는 못 갚아도 원수는 제가 꼭 갚습니다. 이 원수 반드시 갚아드리겠습니다."
하여 웃으며 나는 길을 떠났다.
雲水의 길은 길 없는 길로 가는 나그네. 문 없는 문을 밀고 서른 한 살에 인연터가 된 원주로 왔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지만 사는 게 막막하고 기가 막혔다.
부처님은 절터만 주시고 먹을 건 주시지 않았다. 구름 낮게 드리우고
무엇이 그리도 아득한 것인지 어둑한 것인지.
하여 절터에 텐트를 치고 인력에 나갔다. 첩첩산중이라 신도가 있을 리 없었다. 다행이 아침에 두번 점심에 한 번 저녁에 두 번 버스가 신작로 길에 먼지를 달고 다녔다.
스님의 알바로 개잡부로 나선 지 삼년 되는 해였다. 일이 있는 날도 있었고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일이 없는 날엔 읍내 도서관에서 살았다. 나에겐 달랑 찢어진 군용 텐트 하나에 군용침대, 석유곤로, 냄비 하나 발우 뿐인 살림살이였다. 그래도 읍내 도서관에 가면 컴퓨터도 있었고 프린터도 있었다.
그때 그 스님이 물어물어 삼 년이 지나 후에 나를 찾아 온 거였다.
"뭐 해드릴까요? 진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반가움에 두 팔 벌려 안았다.
"부족하지만 안락하게 살고 있어. ....다 지난 일인데 뭐."
나보다 두 살 어린 스님이었다. 내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스님은 나를 찾지 못했을 거라 했다.
"컴퓨터 사드릴까요?"
천막 안에 있는 타자기를 보고 스님이 물었다. 기일이 있으면 도서실에서 컴퓨터로 작성해서 메일로 보내지만 급한 청탁이 들어오면 원고를 타자 쳐서 읍내 도서관에서 팩스로 원고를 보내곤 했다.
"응, 프린터도. 그런데 여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푸 하하하하."
우리는 낄낄대고 웃었다.
그제야 텐트 안에 라면 한 박스와 블루 스타, 그리고 쌀 10키로 봉지가 보였다. 다행이 절터까지는 4륜구동차는 올라오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그 스님은 갔다. 그리고 한 달 뒤였다.
절터로 전봇대가 들어왔다.
"이게 무슨 기적이래?"
시은을 받는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 스님의 시주였다. 전기를 놓으려면 마지막 전신주에서 이백 미터 까지는 한전에서 전기를 놓아주는데 마지막 전신주에서 사백 칠십 미터가 넘어 그 비용이 엄청 났던 것이다.
"어찌 된 거야?"
"머리를 좀 썼죠 뭐."
그날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다.
"어떻게?"
"이백 미터 정도 되는 마을 어르신 밭에 농사용 전기를 제가 놓아드렸죠. 그리고 거기서 부터 이백 미터는 기본이니까, 칠십미터 그러니까 미터당 사만 오천원이라더라고요."
"......."
환호작약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이면 황금박쥐 처럼 나타나곤 했다.
"뭐 드시고 싶어요?"
"....칼국수."
밀가루에 콩가루 쌀가루를 섞어 무를 갈아 그 즙을 낸 물에 우유를 함께 섞어 손으로 치대었다. 반죽을 하고 숙성을 해서 홍두깨로 둥글게 밀어 밀가루를 뿌리고 돌돌 말아 송송 썬 칼국수를 삶아 내주곤 했다. 참으로 헌신적이었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살면서 힘들 때마다 그 스님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때 그 시절 참 고마웠지, 하며 관세음보살을 찾았는데 이제 다시는 그 스님은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내게는 떠나는 것들이 왜 이리 많아 지는지. 매 해, 옥수수며 고구마, 호박, 김장을 해서 김치를 조금 정성스레 보내주었는데. 비는 또 그날처럼 청승맞게 내리는데. 그랬다. 나의 권위는 그렇게 평생 두 살 많았던 거 뿐이었다.
바둑을 두다 물려 달라고 어거지를 부리기도 하고 부탁이 있으면 생떼를 쓰기도 했다. 원리원칙에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했던 나를 평생 존경하고 걱정하며 살았다는 그 스님. 함께 앉으면 밤을 세우던 정진의 날들.
그런데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갈 길 놓친 나를 두고 먼저 휙 가버렸는지. 이제 금생에 누구에게 무즙을 내어 밀가루에 콩가루를 반죽한 칼국수를 얻어 먹을 수 있을련지.
이제 내 생에 바람 불고 비 오는 날,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 오던 칼국수 스님이 내게서 영영 사라진 거였다. 올해도 겨우 김장배추 심었는데, 그렇게 또 가을은 다가오건만. 짜아식, 나보다 어린 놈이 그래 나를 두고 먼저 가다니. 님은 먼 곳에, 라는 노래를 반복으로 틀어놓고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창문 밖을 한 시간이나 내다보고 울다가 웃다가 '바람부니 나무가 흔들리고 물결이 높아지네, 진통제를 어디 두었더라, 하는데 .
얕은 신음소리를 내다 분명 스님은 길을 아는 스님이니 차안(此岸)을 뛰어넘어 피안(彼岸)으로 건너 갔을 것이다, 하는 비는 그치고 안개 낀 새벽부터 매미가 울어대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