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통신】 토란국과 보리밥을 먹으니

_고양팔현,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선생 이야기

김기현 의성김씨 파주종친회장 승인 2021.10.14 22:15 | 최종 수정 2021.10.15 00:31 의견 0

시국이 어수선할수록 새삼 옛 성현의 자취가 그리워진다. 조선시대 고양을 대표하는 인물로 ‘고양팔현(高揚八賢)’이라 부르는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복재(服齋) 기준(奇遵),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 행촌(杏村) 민순(閔純),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 만회(晩悔) 이유겸(李有謙)이 있다. 그중 사재 김정국 선생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목민관이자 청백리이며 대학자로서 이름을 남기고 있다.

또한 사재 선생은 우리 의성김씨 문중 19세손으로, 그의 형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선생과 함께 후손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더구나 고양시에는 선생을 기리는 사재공원과 사재정이 있고, 파주시에는 선생의 묘역이 있으니 이 지역에 사는 후손으로서는 자랑스러움과 더불어 그의 학덕과 정신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고양아람누리 건물을 지나 정발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한 사재정은 전통정원과 함께 고양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산책을 나온 시민들이 잠시 사재정 앞에 세워진 안내판의 ‘사재정과 김정국 선생 이야기’를 읽고 있다. <사진 | 유성문 주간>

사재 김정국(1485∼1541) 선생은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 또는 팔여거사(八餘居士)이고,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문경공(文敬公) 모재 김안국(1478∼1543) 선생의 아우로서, 10세와 12세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이모부인 조유형(趙有亨)에게서 양육되었다.

1509년(중종4년)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1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이조정랑·사간·승지 등을 역임하고, 1518년(중종13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음해 기묘사화로 삭탈관직되어 고양(高陽)에 내려가 ‘팔여거사’라 칭하고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심하였으며,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1537년(중종32년)에 복직되어 다음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수십조에 달하는 백성을 편하게 하는 정책을 건의해 국정에 반영케 하였으며, 그 뒤 병조참의·공조참의를 역임하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540년(중종35년)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뒤에 예조·병조·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성리학과 역사·의학 등에 밝았다. 사후에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용강(龍岡)의 오산서원(鰲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사재집(思齋集)>을 비롯하여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 <역대수수승통지도(歷代授受承統之圖)>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기묘당적(己卯黨籍)> <사재척언(思齋摭言)> <경민편(警民篇)> 등이 있다. <성리대전절요>는 1993년 보물 제1157호로 지정되었다.

사재 선생의 호인 ‘팔여거사’란 세상에 나서지 않고 초야에 파묻혀 사는 사람으로 여덟 가지 넉넉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어느 친구가 ‘팔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출처: 국역 <사재집(2016)>, P.441).

토란국과 보리밥을 먹으니 여유가 있고(芋羹麥飯飽有餘/우갱맥반포유여)

부들방석 따뜻한 온돌에 누우니 여유가 있고(蒲團煖堗臥有餘/포단난돌와유여)

지하에 샘솟는 맑은 물을 마시니 여유가 있고(涌地淸泉飮有餘/용지청천음유여)

서가에 가득한 책을 보니 여유가 있고(滿架書卷看有餘/만가서권간유여)

봄꽃과 가을달밤을 감상하니 여유가 있고(春花秋月賞有餘/춘화추월상유여)

새소리와 솔바람소리를 들으니 여유가 있고(禽語松聲聽有餘/금어송성청유여)

눈 속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향기를 맡으니 여유가 있고(雪梅霜菊嗅有餘/설매상국위유여)

이 일곱 가지 여유를 취하여 즐기니 여유가 있다(取此七餘樂有餘也/취차칠여락유여야)

사재정 앞 연못의 수면 위로 가을 하늘이 드리우니 한껏 여유롭기 그지없다. 마치 ‘새소리와 솔바람소리를 들으니 여유롭다’던 팔여거사 사재 선생의 말처럼. <사진 | 유성문 주간>

대표적인 제자로 고양팔현으로 문봉서원에 함께 모셔진 추만 정지운(1509~1561년)이 있으며, 정지운은 죽으면서 유언으로 스승인 사재 선생을 그리워하여 선생이 계셨던 현 고양시 사재공원을 바라보는 곳에 산소를 쓰라는 유언을 남겨서 후손들이 산소를 사재공원 방향으로 모셨다고 전해진다.

산소는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 123번지에 위치한 묘역에 있으며, 아래 입구에는 갈(碣) 형태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묘역 아래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숙종 때 소론의 거두였던 좌의정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가 비명을 썼으며, 비각의 현판은 중국 명필가의 글씨에서 한 자씩 뽑아와 필체가 예술이다. 봉분 앞의 묘비는 원수방부(圓首方趺)의 형태로 1546년(명종1)에 건립한 것이다. 선생의 산소는 이모부 조윤형 선생의 산소 아래 모셨으며, 매년 시제도 이모부와 같이 드린다. 키워주신 은혜를 지금까지 후손들이 지키는 아름다운 의리의 모습이다.

사재 선생을 기리기 위한 사재공원이 고양시 정발산동에 있으며, 사재정(思齋亭)은 고양아람누리 뒤편의 전통정원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사재정을 지은 이유는 선생과의 인연 덕분인데, 선생은 기묘사화로 잠시 조정에서 물러난 뒤 이곳 정발산 기슭에 ‘은휴정(恩休亭)’이라는 정자와 ‘육무당(六務堂)’이라는 강학당을 짓고 머물며 약 20년간 활발한 저술활동과 함께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고양시에서 이를 기려 정발산 등산로 입구에 정자를 짓고 ‘사재정’이라 이름한 것이다.

또한 고양시에서는 현재 사재 선생을 비롯한 고양팔현을 배향한 문봉서원의 복원을 추진 중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문봉서원이 복원되어 사재 선생을 비롯한 고양팔현이 재조명되고, 그들이 추구했던 충효와 목민의 정신이 되살아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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