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혜범 작가/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2.10.04 00:57 의견 0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개도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 개도 부처가 될 수 있을까?

내 머무는 암자에 진돌이 믹스 보리가 있다. 가끔 외출할 때가 있다. 보름에 한번 병원에 가고 도서관에 책 반납하고 대출할 때, 장보러 나가면 보리가 마을과 길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 종일 나를 기다리곤 한다는 것이다. 불러도 고개를 한번 휙 둘러볼 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단다. 몰랐다. 내가 없을 때는 그렇게 사중 식구들이 밥을 주어도 밥을 먹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 모습을 본 같이 머무는 30대 초반의 공시생이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 물었다.

스님, 보리에게 불성이 없어요?

없다.

왜요?

일체 중생이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어찌 개는 없습니까?"

개에게도 업식이 있기 때문이다

......네?

너의 원(願)과 행(行)은 무엇인가? 그것은 업식이다.

70대의 거사님이 내게 묻는다.

보리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있다면 어찌 저런 개의 몸을 하고 태어났습니까?

개가 개로 태어나고 싶어 개로 태어난 거 아니잖습니까?

......네?

불성이 있다, 없다로 젊은 처사와 늙은 거사가 부딪혀 논쟁을 벌이다 다른 문제로 삐진 모양이다. 아무도 없다고 노거사가 법당만 나오면 침을 아무 데나 뱉고, 소변도 아무 데나 본다는 것이다.

부처고 중생이고 따지는 게 다 차별이고 분별심입니다. 불교는 이론이나 관념적 사변(思辨)이 아닙니다. 제발 다투지 마시고 조화롭고 화목하게 살자고요. 개에게 불심이 있으면 어떻고 불심이 없는 게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망상의 유희일 뿐.

귀신사 | 사진 유성문 주간

두 사람 다 스스로 번뇌를 만들어 괴로워하고 있었다. 업을 지을 뿐이다. 나쁜 업의 결과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다. 젊은이가 좀 무례했나보다. 그렇다고 나이든 이가 내게 일러바치는 건 또 뭔가. 괴로움, 업의 원인은 생로병사,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 애별리고이다. 집착과 탐욕을 끊음으로써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실천행동에 묘체가 있는 것이거늘.

선(禪)이란 언어나 문자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말과 단어에 집착한다면 본성을 이해할 수 없고, 불성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것도 구할 수 없다. 답은 자기 자신의 물음에 자기 자신이 말하는 것이 답이 되는 것이다. 다 무(無)요, 공(空)이라 했다. 쓸데없이 유무(有無)에 수행의 높고 낮음에 망상 피우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에 씁쓸해 하며 자기 방으로들 돌아간다. 더 재미있는 일은 거사가 떠나겠다고 짐보따리를 싸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스님. 네?

개도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요. 개도 부처가 될 수 있을까요?

따다부다 잘 하는 노거사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내가 젊은이 편을 든다는 것이다. 갑자기 피곤해졌다. 불뚝 화를 내는 것에.

유불성은 공즉시색의 일이고, 무불성은 색즉시공의 일이죠. 유는 소에게 뿔이 있다는 것이고, 무는 철우에 피골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유라고 해도, 무라고 해도 같은 소일 뿐입니다. 왜 이리 들이받길 좋아하시는지요? 결국 우리는 자신의 그릇대로 살 뿐입니다.

차갑게 질책했다. 내가 있을 때는 도인처럼 행동하고 내가 없을 때는 담배도 아무 데서나 피우고 개처럼 행동했던 모양이다. 거사가 짐을 꾸리는 태세였다. 가는 사람 붙잡지 않았다.

보리가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가는 사람 배웅하는 세 사람을 뚫어져라 올려다본다. 그리고 대방으로 들어왔다. 보리가 쭐레쭐레 따라 들어온다. 그나저나 주인이 늙고 아파 두고 간 개가, 그 개가 노인이 거주하던 빌라 입구 계단에서 하염없이 마냥 주인을 기다리던 개를 TV에서 본 적이 있다.

개가 몇 년이나 살지? 하다 보리가 이제 네 살이니, 속으로 가늠해 본다. 아무래도 보리 때문이라도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해야겠다고 다짐해 보는 날이다.

저작권자 ⓒ 고양파주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