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로 세상읽기】중국 최대의 개방국가, 세계제국 당나라

김위영 산업번역 크리덴셜 대표 승인 2022.12.04 23:45 | 최종 수정 2022.12.05 07:45 의견 0

This Tang expansion through the oasis trading cities of the Silk Road opened the way for increased contact with West Asia. The Tang capital at Chang’an became a great international metropolis, a focal point of the Eurasian world. Between 600 and 900 no Western capital could compete in size and grandeur. --John King Fairbank, China, A New History, P78

비단길 주변 오아시스 무역도시를 통한 당의 팽창은 서아시아와 접촉을 증대시키는 길을 개방했다. 당의 수도 장안(長安)은 거대한 국제도시가 되었으며, 유라시아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600년에서 900년 사이에 존재한 어떤 서구의 수도(首都)도 규모나 장엄함이라는 면에서 장안과 경쟁할 수 없었다. --존 킹 페어뱅크 <신중국사> 중에서

중국 당(唐) 제국은 고조 이연에 의해 618년 건국되어 907년 20대 황제 예종 때 멸망하기까지 289년간 지속되었다. 당나라는 오호족(五胡族)과 선비족(鮮卑族) 등 이민족과 결혼을 통해 신선한 피를 받아들인 나라로, 대외적으로 개방과 대내적으로 포용 정책을 추진했다. 당나라는 외국 문물의 교류 통로인 육로 비단길 이외도 대규모의 해상무역을 통해 해상 실크로드를 개척하여 동남아, 인도, 페르시아, 아프리카와 연결되었고, 당시 최대 제국인 이슬람 제국과 교류했다. 또한 한반도, 일본, 베트남, 서역과 동질적인 문화와 예술을 공유했다. 당나라의 국제양식이 여러 국가들에게 전파된 결과이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 지구적인 교차로였다. 인도인, 한국인, 일본인, 유대인, 아라비아인뿐만 아니라 돌궐인, 위구르인, 소그드인까지 세계 각지에서 온 상인들도 장안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했다. 당나라에는 외국 유학생들이 많아서 당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료로 임명된 신라인이나 일본인이 다수였다. 신라 하대에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의 수가 200명이 넘었고,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사람은 58명이나 되었다. 고구려, 백제, 일본도 유학생을 파견했다. 신라 해상왕 장보고는 824년 중국 연태(煙台) 산둥반도에 법화원(法華院)을 창립했다. 이처럼 당 제국은 그 당시 세계 최대의 개방된 국제국가였다.

◆ <The Tang Dynasty(당 제국, 2009)>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사학과 교수인 Mark E. Lewis(마크 루이스, 1954~ )는 중국사 전문가이다.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History of Imperial China)>의 진·한, 남북조, 당까지 세 권을 모두 집필했다. 경제, 문학, 신화, 종교, 철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중국 고대를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개성 있는 연구를 하고 있다.

MOST Chinese the Tang dynasty(618~907) as the highpoint of imperial China, both politically and culturally. The empire reached its greatest size prior to the Manchu Qing dynasty, becoming the center of the East Asian world linked by religion, script, and many economic and political institutions. --P1

대다수 중국인들은 당 왕조(618~907)를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국제국의 절정기로 인식하고 있다. 당 제국은 만주족의 청 왕조 이전에 있었던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종교, 문자, 그리고 다양한 경제적, 정치적 제도로 연결되었던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이었다.

But Tang cities also underwent major changes, most notably in the way that business and trade transformed their physical structure and their links to larger networks. --P85

그러나 당대의 도시들은 중요한 변화도 겪었으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상업과 교역이 그 도시들의 물리적 구조를 변모시켰고, 그들 사이의 연결을 보다 넓은 네트워크로 확대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Chang'an was the primary capital and the best documented both textually and archaeologically. However, the eastern capital, Luoyang, was also a thriving metropolis, especially during the reign of empress Wu, Its revival as a capital was closely linked with the figure of the Sui Emperor Yang, whose extravagance was blamed for the fall of that dynasty. --P98

장안(長安)은 가장 중요한 수도였고, 문헌학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가장 풍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동도(東都)인 낙양(洛陽) 또한 대도시로서, 특히 측천무후(則天武后) 시기에 크게 번성하였다. 수도로서 낙양의 부활은 수양제라는 인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그의 사치스러움은 수 왕조의 멸망시킨 원인으로 비난받는다.

But it was large-scale, water-based commercial shipping that truly transformed China in the Tang and subsequent dynasties. Huge fleets, often numbering more than three thousand vessels; moved along the grand Canal and provisioned not only the capitals but the northwestern frontier. --P138

당대와 그 이후의 시기에서 중국을 진정으로 변화시켰던 것은 바로 대규모 수상운송의 발전이었다. 종종 3,000척 이상의 선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선단들이 대운하를 따라 이동하면서 수도뿐만 아니라 북서의 변경지역에까지도 물자를 공급했다.

A large part of the 200,000 inhabitants consisted of foreigners: Indians, Persians, Arabs, Javanese, and Malays. A foreign quarter south of the river was set aside by imperial sanction for these people. Gradually this settlement became a permanent sprawling foreign community that was much larger than the walled Chinese settlement. --P169

20만 명의 거주민의 대부분이 외국인이었고, 그들은 인도, 페르시아, 아랍, 자바, 말레이에서 온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장강(長江) 이남의 외국인 구역은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황제가 승인하여 따로 두어졌다. 점차 이러한 거주지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국인 거주지역보다 훨씬 더 넓게 퍼져나가는 항구적인 외국인 커뮤니티가 되었다.

Zoroastrians, Manicheans, worshippers of Mazda, Nestorian Christians, and Jews also entered Tang China as merchants and missionaries, but Buddhism was the great foreign faith. --P173

조르아스터교, 마니교도, 아후라 마즈디의 숭배자, 네스토리안 기독교도, 유대교도 또한 당대 중국에 상인으로 그리고 전도사로 들어와 있었지만, 불교야말로 당시 외국에서 들어온 최대의 종교였다.

But this high point of female political policy in imperial China was merely the culmination of a long process that began with the fall of the Han. The nomad warriors who occupied north China after the Han brought with them the greater equality of men and woman that characterized nomadic societies. --P180

중국에서 이와 같이 여성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한의 멸망 이후 장기간 동안 축적된 결과로 설명한다. 한 멸망 이후 중국 북부지역을 차지한 유목인 전사들이 유목사회를 특징지었던 여성과 남성의 상대적 평등을 중국에 가져왔다는 것이다.

THE TANG dynasty marked the highpoint of institutional Daoism and Buddhism in imperial China, both in social influence and intellectual prestige. Daoism enjoyed unparalleled political influence owing to the support of the imperial family, and Buddhism emerged during this period as a truly Chinese faith. --P207

당 왕조는 제도 종교인 도교(道敎)와 불교가 중국 제국에서 사회적 영향과 지성적 권위에서 최고의 정점을 찍은 시대였다. 도교는 황실의 후원 덕분에 다른 종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정치적 영향력을 누렸고, 불교는 이 시기 동안에 진정한 중국인들의 신앙으로 출현했다.

The Tang is the literary dynasty par excellence in Chinese history, celebrated for its great writers and, above all, for the excellence of its poetry. The period’s leading poets—Wang Wei, Li Bo(Bai) and Du Fu—are almost universally accepted as China’s greatest authors. --P241

당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특히 뛰어난 문학적인 왕조로서 그 위대한 작가들, 무엇보다 뛰어난 시문학으로 칭송받았다. 그 시기의 지도적인 시인들, 즉 왕유, 이백, 두보는 거의 보편적으로 중국 최고의 작가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Ennin’s Travel in T’ang China(엔닌의 당나라 여행기, 1955)>

미국 하버드대학교 사학과 교수였던 Edward O. Reischauer(에드워드 라이샤워, 1910~1990)는 도쿄에서 출생한 역사학자이자 외교관이다. 그는 하버드대학교 교수로서 일본학과 동양학을 연구했고, 이 대학의 옌칭(燕京)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그는 일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의 여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번역했고, 그 기록을 중심으로 <엔닌의 당나라 여행기>를 썼다. 현장의 <대당서역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더불어 동양의 3대 여행기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이다.

Ennin, a Japanese Buddhist monk, crossed the sea, to China in the year 838 and during the next nine and a half years kept a detailed diary of his travels through the vast T’ang Empire until he finally returned to Japan in 847. The lengthy record of his wanderings and of his tribulations and triumphs is not only the first great diary in Far Eastern history; it is also the first account of life in China by any foreign visitor. --Pxv

일본의 승려 엔닌은 서기 838년 바다를 넘어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일본으로 돌아오는 847년까지 9년 반 동안 광대한 당 제국에 관해 상세한 일기를 남겼다. 그의 방황과 고난, 그리고 승리를 기록한 방대한 기록은 극동의 역사에서 최초의 위대한 일기일 뿐 아니라 외국 방문자가 쓴 중국 생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Yet Ennin long preceded the Italian to that great land and left what is in some ways an even more remarkable record of his peregrinations. The illiterate Marco polo, years after his travels were over, recounted his adventures orally and in broad and sometimes hazy outline, but Ennin’s day –by-day diary of his varied experiences is a unique document for its time in world history. --P3

하지만 엔닌은 이탈리아 마르코 폴로보다 먼저 저 위대한 중국에 도착하여 어느 의미에서는 마르코 폴로의 기록을 능가하는 놀라운 여행기를 남겼다. 문맹자인 마르코 폴로는 여행이 끝난 뒤 몇 년이 지나 자신의 모험담을 구전한 것이므로 광범위하고 때로는 흐릿한 윤곽만을 이야기했으나, 엔닌의 다양한 경험을 하루하루 쓴 일기는 세계사에서 그 당시로는 독특한 문헌이다.

Viewed as a geographic segment of human society in the ninth century, it is even more outstanding, because then, perhaps more than at any other time, China led the world as the richest, most advanced, and best organized land on earth. --P9

9세기가 인류사회의 지리적 구분이란 입장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나라는 다른 어떤 시기의 나라보다 지상에서 최고의 부와 진보, 그리고 최고의 조직을 이룩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Ennin, of course, was to do far more. In fact, of all the members of the embassy, he was to prove historically the most important and also the most famous. --P99

물론 엔닌이야말로 그 이상의 일을 완수했다. 사실, 모든 견당사(遣唐使) 일행 중 엔닌은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하며 또한 가장 유명하게 되었다.

Then, as now, some eleven centuries later, these three people were the major national groups of that part of the world, and of the three the Koreans played the least known but, as we see in Ennin’s diary, perhaps the most interesting role. --P272

그런데 11세기 정도가 지난 현재처럼 이들 세 민족은 당시에도 세계의 그 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국가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삼자 중에 신라 사람이 차지하는 역할은 가장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들이 엔닌의 일기에서 보는 것처럼 아마 가장 흥미 깊은 역할을 한 것은 신라 사람이었다.

The days of Korean maritime dominates in the Far East actually were numbered, but in Enni’s time the men of Silla were still the masters of the seas in their part of the world. --P287

극동에서 신라 사람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날은 실제로 한계가 있지만, 아무튼 엔닌 시대에는 신라인들이 세계적으로 이 부분에서 해상의 지배자였다.

Whatever may have been the exact steps leading up to Chang’s downfall, his death and the subsequent disappearance of his maritime commercial empire very probably marked the passing of the high–water mark of Korean mastery over the seas lying between China, Korea, and Japan. --P294

장보고(張保皐)의 몰락을 이끈 정확한 진행이 어떤 것이었든 그의 사망과 그에 따른 그의 해상무역 왕국의 소멸은 중국, 신라, 그리고 일본 사이에 가로놓인 공해에서 최고조의 신라 제해권이 내리막길로 향했다는 것을 말한다.

◆ <China’s Golden Age(중국의 황금시대, 2002)>

미국 하와이대학교 Charles Benn(찰스 벤, 1945~ ) 교수는 당나라의 일상생활을 통해 당 제국의 역사, 사회, 도시, 주택과 정원, 음식과 축제, 여가와 취미, 여행과 운송, 범죄와 처벌, 질병과 건강, 인생 주기, 죽음과 사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The Tang dynasty is worthy of special treatment because it was golden age of Chinese culture, at least in the opinion of many later Chinese. They have esteemed two of its poets as the greatest in their history. An anthology of three hundred Tang poems compiled in the eighteenth century is still the primer for children when they begin their study of verse. --Pix

당나라는 중국문화의 황금기였기 때문에 적어도 많은 후대 중국인의 입장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다. 그들은 두 시인(이백과 두보)을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했다. 18세기에 편찬된 300편의 당 시집은 아직도 아이들이 운문을 공부할 때 입문서이다.

The Tang dynasty was one of the most cosmopolitan in Chinese history. Influences from abroad affected nearly every aspect of life, from music to medicine. Part of the reason for the tolerance of things foreign was Buddhism, which reached the heigh of its development and popularity in the Tang. --P40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국제적인 국가 중 하나였다. 해외로부터의 영향은 음악에서 의학에 이르기까지 삶의 거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쳤다. 외국에 대한 관용의 이유 중 하나는 당나라에서 그 발전과 인기가 절정에 달한 불교였다.

Western dress became fashionable in the 740s and 750s. It is not clear from which westerners the Chinese adopted the style. They were probably Central Asians, but they may also have been Persians. Men sported leopard skin hats, and the women wore hairpins with trinkets that jingled when they walked. --P106

서양 의상은 740년대와 750년대에 유행했다. 중국인이 어떤 서양인에게서 양식을 채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중앙아시아인일 수도 있지만 페르시아인일 수도 있다. 남자들은 표범 가죽 모자를 썼고, 여자들은 걸을 때 소리가 나는 장신구가 달린 머리핀을 착용했다.

The fall of the Tang in 907 marked the end of the medieval period in Chinese history. --P294

907년 당나라의 멸망은 중국 역사에서 중세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 중국 역사에서 당나라가 가장 개방된 나라였다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문물이 발달하고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던 국제도시였으며, 측천무후가 18년이나 집권하는 여권이 신장된 흥미로운 시대였다. 황제와 신하가 협력하여 태평시대를 열었고, 황제가 무능하면 환관이 통치를 대신했다. 비록 무능한 황제로 인해 일어난 안록산의 난 이후 절도사가 군웅할거하며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당나라는 전 시대를 통해 외국과 소통하고 교류한 국제적인 국가로, 중국의 도자기, 목판인쇄, 금속공예, 약재 등 많은 문물을 전파했고, 외국에서도 향료(香料), 말, 모피, 상아, 인삼 등을 수입하기도 했다.

당 제국에서는 왕실의 지원은 받은 도교(道敎)가 유행했지만, 한편으로 다양한 종교가 유입되었다. 티베트의 불교도들, 페르시아의 성직자,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 조로아스터교도 등 수많은 종교인들이 몰려와 포교했다. 당나라에서 신라로 네스토리우스교(Nestorianism)인 경교(景敎)가 전파되었다. 당나라 불교도 화엄종(법장), 율종(도선), 법상종(현장), 밀교(선무외), 천태종, 선종, 정토종 등 다양한 종파가 성립되어 동북아지역 불교 확산의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과거제가 시행되고 이백, 두보, 왕유, 백거이 등 기라성 같은 당나라의 문장가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 제국은 국제무역이 발달하여 특히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와의 국제교역과 해상교역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인도, 동남아시아와 해상교역이 번성하자 8세기와 9세기에 중국 중부와 남부가 점차 번영을 누렸다. 742년 당나라의 인구통계에 따르면, 당시 전체 인구(6,000만 명 정도로 추정)의 절반이 남중국에 거주했다. 오늘날에도 당 왕조는 중국인에게 엄청난 문화적 자부심의 원천이 된 거대한 국제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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