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오늘은 조금 오래 걷다 바다엘 가기로 했다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3.03.14 09:00 의견 0

바다엘 가기로 했다.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기로 했다.

지난 겨울 식(識)으로 살았다. 경(境)은 없었던 유식무경(唯識無境)의 날들이었다. 마음 뿐이었고 칩거에 가깝도록 살았다. 느리고 답답하게. 나의 인식과 존재는 그러하였다. 스스로를 가두었다 할까. 그렇다고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바다엘 가면 파도소리 들리고 갈매기 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교에서 識이란 마음상태를 일컫는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이에 비해 경(境)은 감각에 의한 감각대상? 사유에 대한 사유대상? 욕망에 대한 욕망대상? 일체의 대상은 경(境)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산속을 존재의 바다라 여기고 항해하듯 몸과 마음을 놀렸다.

그랬다. 나는 내가 있는 곳은 가장 멋진 곳이라며 살았다.

무엇을 입고 먹고 자는 거보다 행복감각을 더 키우려 했다.

면벽 아닌 면벽, 안거 아닌 안거를 보내는 동안 겨우 내내 줄곧 바다가 내게 있었다. 경(境)을 동경하며. 들끓는 내면의 바다를 잠재우며.

어찌 되었든 식(識)을 떠난 경(境)은 있을 수 없는 거였다. 나는 불교 이론가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그 쯤으로 해석했다.

산에 사니 산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다시 건너편을 보니 아직도 산은 거기 있었다.

봄바람을 타고 산이 내게로 온다. 내게로 온 산이

우리 바다에 가요. 바다는 또 다른 산이라며


눈뜨면 바다인, 바닷가 암자에 산 적이 있었다. 창문을 닫아도 바다가 치는 파도소리에 가는 귀가 먹을 정도로 해안에 닿은 곳이었다.

밀물이 들 때의 파도소리와 썰물 질 때의 파도소리가 다르다는 걸 안 때도 그때였다.

그러나 바다에 살 때는 바다를 보지 못했다.

암자 옆의 어민들은 새벽이 되면 바다로 나갔다. 기름값도 못하고 허탕을 치고 들어오기도 했다. 바다보다 바다 다운 바다는 중생들의 가슴 속에 들어 있었다.

화사한 코발트블루의 모자를 쓴 바다

프러시안 블루, 진한 블라우스를 입은 바다

바다에 깔린 웨지우드 블루의 하늘이 보고싶은 거다.

언능 와! 바다에도 꽃이 핀다고.

바다가 부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목숨의 바다는 지금도 그렇게 그렇게 철썩거리겠지. 바다에 살 때는 그리도 산이 그리웠는데 산에 사니 바다가 그리워 몇 년에 한번씩 바다엘 간다. 봄바람 부는데 이번에 만나는 바다는 어떤 바다일까. 바다는 잘 있을까?

아마 아직도 바다는 거기 그렇게 잘 머물고 있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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