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업의 일상통신】 동지, 혹한속 도서관 가는 길

원동업 <성수동쓰다> 편집장 승인 2023.12.26 09:45 | 최종 수정 2023.12.26 10:28 의견 0

군대란 집단 수용소이다. 겨울 영내에 있으면 늘 추웠다. 같은 날이라도 영내를 벗어나는 순간 훈풍이 불었다. 따뜻한 바람. 오늘 그 기운을 다시 느꼈다.

책읽는엄마 책읽는아이 도서관을 가느라 신금호역에서 내렸다. 두 달 만에 만나는 오프 모임이다. 5번 출구로 나오면 언덕 하나를 넘어 금남시장에 이르는 길이 있다. 동지 팥죽을 나는 그곳 시장서 살 예정이다. 수요낭독모임 처음처럼 사람들과 나누어 먹을 거니까. 약속한 동료를 기다리느라 주변을 돌다가-시계도 고장 나서, 혹시 문을 연 시계수리점이 있을까 찾을 겸-, 5번출구로 나오고 있다는 카톡 메시지를 보았다. 바깥쪽까지 길게 연결된 5번 출입구 아케이드에 들어선 순간 느껴진 훈기. 지금 역안은 훈기가 차올라오고 있다.

동료를 만나기 전 우리가 걸어갈 큰 길 옆 작은 이면도로를 배회했다. 올라가면 등성이 너머 작은 독립책방 <푸르스트의 서재>가 나오는 길이다. 길 중간에 <카모메 그림책방>이 있다. 그 곳으로 다가선다. 문 앞쪽엔 아마도 고양이 급식소인 듯한데, 그릇 안 물이 얼어있다. 화초는 비닐에 싸여 찬바람을 막고 있다. ‘동계 예약제 운영’ 안내가 창문에 붙었다. 안쪽을 들여다본다. 늘 한결같은 모습의 그림책들이 아주 한겨울이지는 않을 공간 안에 배열돼 있다.

창 앞으로 눈길을 걸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띈다. 책표지에 그려진 삽화-표지그림-다. 독서일기. 문재인의 독서일기. 독서일기. 일마다 책을 읽고 쓴 글. 그 풍경을 보자 다시 한번 마음이 따뜻해졌다. 시련의 시기에 우리가 할 일중 하나는 독서일 것이다. 유배를 간 많은 이들은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더 인간다워지고 더 강해졌다. 모든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책은 동료만큰 가족만큼 위안이 되는 친구가 된다. 감옥이란 영내에서 책을 펼칠 때, 그에게 온기가 불어오기를.

동료와 나란히 언덕길을 걷는다. 마지막 본 게 지난 동지였을 게다. 언제 보더라도 어제 본 듯한 이들로 우리 독서모임은 구성돼 있다. (새 사람들이 들어오기 어려운 구조일 것인데, 새 사람들 새 술은 새 부대에) 대화는 사적인 것들이다. 어떻게 지내세요. 지난달쯤 대상포진에 걸려 고생했어요. 대상포진의 비공식적 병명이 ‘할 말이 있는데, 할 수가 없네요’라고 하던데요. 동료는 심리상담을 한다. 어려운 말들을 흡수해야 하는 일. 그렇게 들어온 찬바람 부는 말들을 품고 정작 자신은 심리상담사를 찾을 길이 없어서 그럴지 모른다. 그에게도 온기 있는 바람이 불기를.

좌로 금호초등학교와 옛 중앙병원이 있던 등성이를 지나면 비탈진 길이다. 헌책방 <서실리>가 있었던 곳을 지난다. 비탈진 언덕에 선 작은 나무같은 가게였다. 채 세 평이나 될까말까한 공간. 우리 처음처럼 독서모임 회원 10여명이 2017~8년쯤 방문했을 때, 우린 송곳을 세운 것처럼 빽빽하게 몸을 접하고 섰더랬다. (지금은 비어 다른 가게가 됐다.) 골목 옆으로 젓가락처럼 마른 한 남자가 서있다. 외투도 안 입은 걸 보니, 집에서 잠깐 나온 듯. 그런데 담배를 나무젓가락에 꽂고 피우는 중이다. 저래야 하는 이유는 분명 관계 때문일 게다. 아이를 만져야 할 수도 있고, 흡연검사를 하는 엄마나 아내가 있을 수도 있고…. 우리는 어쩜 모두 작은 영내에 사는 군인들 혹은 죄수들일 게다.


금남시장은 금호사거리에서 금호역에 이르는 길 오른편 구역을 대략 가리킨다. 고구마처럼 생긴 작은 공간 중, 장터길가에 숱한 가게들이 있다. 그리고 ‘고구마 속’에 해당하는 곳에 냉면집도 있고, 보쌈집이나 칼국수집 등등등이 또 숱하다. 고구마를 찌른 젓가락처럼 금남시장엔 5개 길이 나있다. 우리는 금남시장 5번 길에서 지난해처럼 팥죽을 살 예정이다. 지난해는 팥죽아줌마는 바깥 길가서 하얀 김을 내가며 팥죽을 펐더랬다. 그 풍성한 풍경에 이끌려 동지팥죽을 샀었지. 오늘 팥죽들은 얌전히 통에 담겨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알아서 오니가 굳이 그럴 이유가 없어요!) 큼지막한 통 하나에 1만2천원. 지난해보다 살짝 더 나이 들었을 팥죽아줌마는 강추위에 얼어버린 냉장고를 녹이려 애쓰고 있다. 큰 냉장고 뒤편에 히터를 바짝 붙여 넣었다. 밤이 가장 긴 날 동지, 며칠이고 북극 한파가 이어지는 우리 동네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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