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작은 참회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4.05.10 09:00 의견 0

봄나물을 캐며

이향란

몇 해째인가

올해도 봄의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지나는 동안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한

흙의 심정을 헤아린다

그가 어렵사리 내놓은 것으로 먹거리를 삼겠다고

봄날 한 순간이 생의 전부인 양 등까지 굽히고

그렇게 나물을 캐다보니

안주하지 못한 채

오래도록 몸 속을 유랑하던 슬픔 하나가

주르르륵

볼을 타고 흐른다

손톱 밑이 까매지도록 캐서

국을 끓이고 조물조물 무쳐먹으면

나도 어느 날엔 새록새록 다시

돋아날 수 있을까?

천지사방 연록으로 천천히

기어갈 수 있을까?

어둠을 떨구고 순박하게 부화한

냉이와 쑥

불현듯 이 여린 것들 앞에 엎드려

어설픈 내 슬픔을 쏟아내며

작은 참회라도 해야 할 듯싶다

이향란 시인은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2002년 시집 『안개詩』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슬픔의 속도』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 『너라는 간극』 『이별 모르게 안녕』 등이 있다.


# 다음 생이 있다면, 너는 뭐가 되고 싶으니?

이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게 없다는 데. 올해는 고비를 만날 수 있을까.

<행복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행복만 찾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어릴적 노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그 말씀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와, 고비다.>

고비군락을 만난 것이다.

<행복하니?>

<예. 행복해요.>

노스님과 나는 부처님 오신 날, 법당에 올릴 나물을 준비하기 위해 산 비탈을 올라가 고사리를 뜯고 있었다. 산은 아침해가 뜨고 저녁 해가 지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새벽예불을 마치고 날이 훤해지자 아침을 먹고 산을 오르니 여기저기 내가 심지도 않았는데 산속엔 여린 고사리들이 제 몸을 구부리며 올라왔다.

<스님.>

<응?>

<고사리보다 고비가 더 맛있어요.>

고사리와 고비는 달랐다. 고비는 봄나물 중에 내가 최고로 치는 나물이 되었다. 고사리의 잎은 삼각형 모양으로 줄기가 비어 있지만 고비는 오각형의 잎을 가지고 줄기 속이 차 있었다. 고사리는 나물로 올렸다. 고비는 나물로도 맛있지만 그 양이 많지 않아 늘 데친 후 말렸다가 국을 끓일 때 넣었다.

<스님은 행복이 뭐세요?>

<나아.... 사는 거. 사는 게 현성, 견성(現成, 見成) 공안이야.>

<사는 건 누구나 다 살잖아요?>

<그러니까 잘 살아야지, 자알.>

그때도 신도가 많지 않은 산중암자였다.

몇 안되는 신도들이 초파일 날 올라오면 비빔밥을 해먹으려고 산나물을 준비했던 것이다.

유랑의 날들, 고비 고비마다 고비나물을 떠올렸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노력하고 정진하라던 노스님,

과연 나는 노스님이 바라는 대로 참되고 가치 있고 바른 승려, 수행자가 되어 있는 건지. 쪼그리고 밭에 앉아 토마토며 가지, 애호박을 심다가 <아이고 제기랄>하고 구겨진 감탄사를 내뱉으며 허리를 펴고 일어선다.

온통 꽃이 형형색색으로 만발한 연록의 봄이다.

이제 나도 그때 그 노스님의 나이가 되고, 노스님의 바램대신 잡승이 된 지금, 이향란 시인이 보내주신 시를 떠올리며 손을 씻고 조용히 법당에 올라가 참회의 깊은 절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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