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5명 중 1명이 65세 이상 노인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했다, 한다. 노년, 노인이라고 생각하는 연령은 대개 평균 71.6세라 한다. 나도 그 베이비붐세대이기는 하지만 노인이 되기에는 아직 몇 년 남았다. 내 나이는 다양한 교차점을 갖는 나이다.
그런데도 나의 것들은 오래되고 낡고 불편한 것들 투성이다. 나를 지탱하게 해주고 지속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들이다.
어떤 교리나 이론이나 이념을 우상화하거나 묶이지 않고 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건 건강한 몸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번잡하고 복잡한 게 싫다. 특히 몸이 그렇다.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된다, 한다. 무엇보다 느려진다. 그리고 조심스러워진다. 이제는 새로운 일을 벌이지 않는다. 매너리즘과는 다르다.
애초부터 다른 이들의 시선엔 눈꼽만큼도 관심없었다. 오로지 나답게 나다움으로 단순하게 살았다. 살아내기, 깨어남의 시간들을 갖고자 했기에 사차원, 또라이 소리를 한두번 들은 게 아니다.
그래도 나이가 드니 지리멸렬해졌다. 이제야 노승이 되어가고 있는 중년인데도 돌아보면 후졌다. 나는 잘나지 못했다. 떠들썩하지 못했고 요란하지도 못했다. 볼품없이 늙었고 그저 멀리서 당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선선하다. 날씨가 서늘해지자 가을은 온 듯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이제 가을이 없어지는 건지. 아침저녁으로 추운 가을이다.
나이가 들자 일은 적게 하고 실컷 논다. 젊은 날은 소처럼 일만 했다. 사는 게 노는 거였다. 노는 게 일하는 거였다. 젊은 날에는 나도 쎄가 빠지게 일했다. 절깐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하지 않으려 든다면 할 일이 없지만 하려고 하고자 든다면 온통 일들 투성이었다. 그랬다. 내겐 일하는 것도 노는 거였다.
놀면서도 산다는 일은 매사 기쁘고 감사한 일이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내가 나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한다. 몹쓸놈의 세월 속에서 나는 운이 엄청 좋았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 보면. 그간 내가 겪어야 했던 고통들, 슬픔들. 돌아보면 즐거웠다. 산다는 건 참는 거고 끈기다. 그랬다. 나를 참 오래도 써먹고 있다.
적당히 하다 멈추어야 하는데 그리하지 않는 나를 내가 엄청 미워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런 나를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헌데 그렇게 나를 볶아먹던 내가 요즘엔 집착에서 포기, 초연으로 바뀌었다. 절깐이 지저분하고 너저분해졌다. 내가 나에게 '그러라지, 뭐!'하며 빠름에서 느림으로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바뀌었다.
중언부언하고 지리멸렬했던 삶, 그래도 '당신의 사랑은 나요', 했던 나였다.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적능력 같은데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왔는 가는 중요하지 않다.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면 지금 이 순간을 즐긴다. '어디만큼 왔니?' 가 아니라 '과연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한다. 그렇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하면 생활이 즐거워진다. 이제와서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 할까.
땡중답게 품위 있는 삶은 차치하고라도 고통과 슬픔으로 벗어나 단순한 삶이 나의 즐거움과 해방이라고 믿고 살았다.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날들, 의미와 목적이 있는 삶을 살지 못했던 날들. 갈망과 애착의 날들. 다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고요해진다.
진정한 행복의 추구는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마음가짐, 의미 있는 삶을 살겠다는 우리들 인생여정에 있어서의 마음챙김인 것이다.
집착하는 까닭에 탐욕이 생기고, 탐욕이 생기는 까닭에 얽매이게 되며, 얽매이는 까닭에 생로병사와 근심, 슬픔, 괴로움과 같은 갖가지 번뇌가 뒤따르는 것이다. 그렇다. 위대한 여행은 정확히 내가 있는 곳, '당신의 사랑은 나요' 할 수 있는 우리들이 사는 세상을 나름 꾿꾿이 건너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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