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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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
이서화
모과는 가을의 화석 같다
길고 긴 시간의 연대를 뭉쳐놓은 것 같고
여름 내내 서툰 공중의 재주가
땀 뻘뻘 흘려가며 수작(手作) 질 해 놓은 것 같고
모과의 일그러진 가을
그런 단단함을 풀어보겠다고
노랗게 색을 바꾸었다
온갖 꽃들이 열대성이나
온화한 기후의 화석이거나
모과는 쌀쌀한 중력의 화석 같다
더 대단한 것은 자신의 화석을 끝까지
따라온 냄새에 있다는 것
냄새를 모으며 뭉쳐진 기형으로
가장 얇고 가는 공기를 틈타는 모과의 향
간혹 발견되는 오래전 미라들은
어떤 사람의 생전의 냄새가 날까 궁금한 적이 있다
굳이 따지자면 가장 단시간,
짧은 기간을 딱딱하게 굳었다 가는
계절성 화석쯤 될까
씨앗이 있는 화석,
그 씨앗 속에는 아득히 먼 옛날이
꽃을 피우고 벌들과 나비로부터
채굴한 향이 있을 것 같다
책상 위에서 미묘한 향이 풀어지고 있다
# 지독한 페이소스다.
모과는 허공에서 얼마나 끙끙 앓거나 덜덜 떨어 해골이 되었을까. 봄에서 가을까지. 천둥과 번개를 끌어안은.
일그러진 모과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시인의 보이지 않는 시의 수작이이리라. 모과가 화석 같다니, 무슨 수작이야? 연상해보면 시골, 옛날, 고향, 어디 무너져 가는 옛집이 있다. 그곳에 삐걱거리는 대문이 있고 그 안에 담장아래 모과가 있는 유년이 있는. 그렇다. 모과는 木瓜라고 쓰지만 목과가 아니다.
몸빼바지 입은 어머니와 경운기를 모는 고단한 아버지. 그 한 폭의 정경 속에, 두엄냄새나던 幼年의 모과가 있다. 울퉁불퉁했던 날들, 까마득한 미래에 대한 겉상처들. 그래도 속은 지극히 개인적인 청춘이었고 무궁하고 싱싱했던 그 모과는 어디로 갔을까.
모과는 꼬이고, 어딘가 뒤틀려있는 것같고, 못났다.
모과는 얽고 못생겨서 한 번 놀라고, 못생긴 열매가 향기가 매우 좋아서 두 번 놀라고, 향기가 그렇게 좋은데 비하여 맛이 없어 먹을 수가 없어서 3번 놀란다 한다.
나도 가끔 반바지에 쓰레빠를 신고 모과나무를 본 적이 있다. 봄이면 싹을 틔우고 탐욕의 열매를 맺고 그 찬란했던 모과가 단단해져 해골이 될 때까지.
무명이고 해탈인가.
해골모과의 형상, 단단해진 가을모과를 바라보는 중년의 시인. 허름하고 낡고 오래된 모과, 딱딱해져 깨질 것 같이 화석이 되어가는 모과의 역사.
나도 요즘 왜 이리 면역력이 떨어져 가는 걸까. 시를 읽자 나도 화석이 되어가는 것 같다. 문득, 꿀에 잔뜩 잰 모과차를 한 잔 진하게 먹고 싶게 만드는 가을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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