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눈동자로 흐르는 원자

박수빈

분모만 커지는 분수처럼

0에 가까워질 뿐 0이 아닌 너

세상 떠나면 너로 떠돈다지

별 먼지 모래 돌멩이도 무생명

죽음 충만한 이 우주에 사는 게 소중해

크거나 작거나 누구나 꽃인 것을

꽃샘에 새로 돋는 잎들 싱그럽고

바닥에는 마른 잎

새 꽃에게 비켜준 모습

넝쿨은 손 뻗어 허공의 길 찾고

구름은 어디서 생겨 내게로 왔을까

구름으로 와서 바람으로 가는데

어디 흔적을 남길 것인가

처음 나 혼자 꽃 보러 왔을 때

아직이라 둘레를 서성였고

그다음 같이 왔을 때

가시에 웅크린 꽃망울

오늘 없는 그를 데리고 오는데

그림자도 따라오며 꽃잎에 스민 비의 날들

기억의 얼음장 밑으로

녹은 눈이 흐르는 풍경

끝의 시작 이어지며 끝도 시작도 없구나

박수빈

시인, 문학평론가. 아주대 국문과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상명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2004년 시집 『달콤한 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열린시학』에서 평론 등단했다. 시집 『청동울음』 『비록 구름의 시간』, 평론집으로 『스프링시학』, 『다양성의 시』, 연구서 『반복과 변주의 시세계』 등을 발간했다.


# 이 우주에 나는 얼마나 작은가. 어쩌다 나 집을 떠나왔던가. 중얼거려보지만 멀리 떠나온 길들, 떠돌던 가혹했던 밤들, 눈을 껌뻑여봐도 흘러들 곳이 없었다.

마침내 봄은 오지 않았고 꽃은 정녕 피지 않았다.

밤 하늘에 이슬로 뚝뚝 떨어지던 유성들, 빈 들판 그 경계로 불던 꽃샘바람들, 입이 돌아갈까봐 앵도라진 입술, 가죽같은 얼굴을 손으로 부비던. 마비가 올까봐 일어나 발을 동동거리고 가만가만 팔을 휘둘러 보던 쥐가 나던 육근. 잠들고 싶지만 잠들지 못하던 밤들 이었다.

<절집 아니면 이 세상 어딘들 내가 살 집이 없을까.>

하지만 아는 사람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너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려 하는고?>

내가 내 삶을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이 세상 주인으로 살고 싶었다. 세상의 을이 아닌 갑으로 떳떳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명민하지 못했다.

이미 세상과 맞지 않는 마음으로 길들여진 몸이었다.

큰 소리 한 번 쳐보지 못했다. 종다리 울음소리 들려도 싸울 용기도 없었고 비난할 기운도 없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 하나 빼기 하나는 영. 쥐약을 손에 들고

엄마는 하늘나라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걸까?

도대체 아버지는?

<여기가 끝인가?> 했을 때 새벽 진달래꽃이 눈에 들어왔고 허겁지겁 그 꽃을 따먹던, 찔레순을 어찌나 꺾어먹었던지 배가 쓰리고 아리던 그 배고픔 추위에 파묻혀도 그래도 살아보겠다던 그 욕망에 파묻혀 <그래 너는 어디서 어떻게 나에게 온 거니?> 내가 나에게 물을 때 새벽 안개들이 아슬아슬했다.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슬퍼지지? 새 세상, 새 날은 오는 거야?

육근은 괴로움의 근본이었다. 위태했던가.

오늘 살아 있다 해도 내일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린 육체는 근심, 슬픔, 고통이었고 괴로움이었다.

눈,귀, 코, 입, 혀는 악의 근원이요, 죄의 덤불이었다.

쥐약을 손에 든 채 <이것이 나의 죄와 복이지> <나그네 되기가 이리 힘든가, 雲水 되기가> 했을 때 복수초 노란 꽃잎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내 마음을 물어뜯던 그 노란 꽃망울을 나는얼마나 노려보았던가. 그 옆의 마른 가지 끝까지 올라가 허공에 늘어져 있던 칡넝쿨들을.

찔레꽃 가시에 찔리던 그 손에 쥐고 있던 쥐약을 그날 산중에 내던졌던가, 아님 다시 그놈을 호주머니에 넣고 그 관음암 새벽산을 기어 내려왔는지 기억이 없다. 기어코 봄은 언제 오는지. 새들은 허공을 자유로이 날아가는데 지금도 나 돌아갈 집이 없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