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을 기다리며

김지헌

뜨거움이 가고 우정이 남듯

내 안의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요란한 소낙비에 꽃들이 절멸

모란도 작약도 지고

이제 수국의 계절

작년 봄 수국을 심어 놓고

꽃을 기다리는 나에게

수국은 다만 맑고 고운 목소리로

오늘 아침에야 대답을 해주었다

시간의 두께 만큼 자꾸만 덧칠 중이던 내게

모란과 작약의 귀태가 사라졌다고

세상이 무너진 건 아니라고

뜨거움이란

사랑이란

갓 시집 온 새색시처럼 참고 삭이는 거라고

여자를 초월한다는 건

또 한 세계가 열리는 일

기다림 뒤에 오는 제법 신나는 일이라고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얼굴을 당겨보다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어느 날

눈가의 주름살에도

소낙비에 짓이겨진 꽃들에게도

엄지 척!

수국마저 가고나면

어떤 세계가 또 신나게 와줄까

김지헌 시인/ 충남 강경 출생. 수도여자사범대학 과학교육과 졸업. 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다음 마을로 가는 길> <회중시계> <황금빛 가창오리떼> 가 있다. 제13회 미네르바 문학상을 수상했다.


# 시는 내게 있어 이번 생을 바꾸게 하는 기도다. 혼자 나를 바로 보게 하는 절벽, 백척간두의 꼭대기다. 봄을 깨물게 하고 어둠을 깨물게 하고 가슴을 품게 한다. 숨 막히는 불꽃이며 뜨거운 삶으로 항해하게 한다.

고통의 바다를 저어나가다 보면, 삶이란, 사랑이란 뜨거움이란 부끄러울 때가 많다. 물살 끝처럼 얼굴로 다가오는 봄바람,산길을 오르다 숨을 고르고 섰다 가만히 바람에 춤추는 봄꽃들을 보면 산 계곡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 내게 '황홀하지?' 하고 귓속말을 하곤 한다. 산수유 노랗게 피었고 물소리 옆으로 진달래 삐죽 얼굴을 내밀며 '나도 좀 봐줘요' 한다.

스님아, <저거 봐!> <아아, 살아있어!> <봄이 가면 여름이 온다고.> <달은 또 이즈러지고>

내 머무는 암자에도 흰 색과 파랑이 섞인 수국이 있다. 오다가다 어쩌다가 달빛 아래 그 눈빛, 입술을 보고 합장을 할 때가 있다.

이 세상 전체가 그대로 사록사록 피어 날 수국꽃들이다. 수국꽃은 질 것이고 수국꽃을 기다림은 마음 안에 있는 것도 아니요, 마음 밖에 있는 것도 아니듯 한 세상, 또 한 세계를 여는 부처의 나타남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꼭 수행자 같다. 오브제(objet), 한 편의 詩로 독자로 하여금 니르바나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엄지 척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 <꽃?> 수국을 통해 머무를 것도 붙잡을 것도 없다는 구체적 자연현상을 통해 <그 어떤 세계>를 기대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그 어떤 세계는 나르바나, 열반. 신나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