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라지만 비척거리는 걸승이었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땡중, 땡땡이였다. 사느라 바빠 계절 같은 거에 눈 돌릴 틈이 없었다. 팔십 년대 초반, 창백한 얼굴로 길을 걷는데 어느 레코드 점 가게 스피커에서 '놀던 아이들 아무 걱정없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왜?'하는 노랠 들었던 것처럼.

그 해도 가을,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낙엽은 꼭 고복(皐復) 같았다. 고복이란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이 생시에 입던 옷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은 허리에 댄 후, 지붕이나 마당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아무 동네 아무개 복(復)’이라 세 번 부르는 일이다.

다 잊었는데, 바라보니 겨울이 또 옆구리에 와 있었다. 아득한 시간들이었다. 서리가 내리고 살얼음도 얼었다. 그해, 주지 자리에서 쫓겨 난 이후, 영등포 역의 화장실에서 신문지 깔고 자기도 하고 서울역 지하도 어둠 속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는 빛을 올려다보며 '음'하고 무거운 한숨을 뽑아내곤 했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

"넌 나처럼 살지 마. 너의 스님처럼 살지도 말고."

"........"

은사님이나, 사숙(師叔)이 떠날 때나 나는 말이 없었다.

승가가 벌레같이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날들이었다. 하루 지나면 다시 아침이었고 저녁 지나면 다시 새벽(一昏復一晨 일혼복일신)이었다.

"아무도 네놈이 누구인지 가르쳐 줄 순 없어. 너는 너의 일부를 설명할 순 있지만, 네놈이 누구인지 그리고 네놈이 필요한 건 네놈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거야. 내가 좌충우돌, 아무리 난리법석을 피우더라도. 늘 알아차려야지."


"......"

"고맙고 감사해 해야지. 네놈이 있는 자리가 꽃자리인 걸. 네놈이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이 절깐 네놈이 앉아있는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거늘. 마음의 감옥에 갇혀 매이고 묶인 거냐고? 네놈이 네놈을 스스로 가두어 놓고 지금 뭐하자는 짓이야?"

"......"

"내가 마음내면 앉은 내가 부처고, 그 앉은 곳, 머문 곳이 바로 수행터라고."

고난을 누가 연꽃이 자라는 진흙이라 했던가.

밤 9시 넘으면 차도 끊기고, 길에 등 하나 없는 깜깜한 밤 열 시의 강 뚝길을 걷던 나는 'my life is now.'하고 중얼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길은 걸어가면, 언제나 뒤에 생겼다. 野僧으로 넘어지고 雜僧으로 쓰러지고. 그러나 강물은 밤낮으로 긴 방죽을 따라 흘러만 갔다. 그렇게 청춘의 시간들은 말할 수 없는 완벽한 실패와 좌절, 절망 뿐이었다.

"해가 뜨는 강을 보아야지. 바람 소리 저 강물이 우는 소리, 강 너머 구름이 떠가며 부르는 노랠 들어야지."

그랬다. 유년시절에는 물안개 피어 오르고 고기가 뛰고 새벽 강물이 흘러가는 것만 바라보아도 가슴이 설렜다.

"넌 나처럼 살지 마. 너의 스님처럼 살지도 말고."

어둠 속의 긴 방죽에 털썩 앉았다. 살아 남은 게 기적의 날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내 생에는 중노릇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게 참으로 한스럽기만 했다. 얼마나 별도 달도 없는 하늘을 그렇게 노려보았을까, 주섬주섬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태워 물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팔자를 속일 수 없다던 차갑게 굴기만 했던 사숙의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